유비가 평생을 한실부흥이라는 명분을 위해 살았던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 한왕실의 혈통을 이은 종친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한실부흥을 외친 인사들은 당시도 적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 유독 유비만이 특별하게 여겨진 것은 바로 그가 한나라 황실과 같은 조상을 둔 종친의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상들이 세운 위업이기에 후손인 자신이 지키고 마침내 다시 일으켜서 영원토록 이어지게 할 것이다. 바로 효다. 조상의 유지를 잇고 그들을 영광되게 하는 것.


관우가 죽고 유비가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켜야만 했던 이유였다. 아니 장비마저 죽고 고작 신하의 복수를 하겠다며 한실부흥의 명분마저 내팽개치고 오나라로 쳐들어가 수많은 병력과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들을 잃었던 어리석은 행위마저 동정하게 되는 이유였다.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여러 민담들을 취합하여 집대성한 것이 바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였다. 그리고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와 관우, 장비 세 사람은 하늘에 맹세하고 형제의 의를 맺은 각별한 사이로 묘사되고 있었다. 친형제와도 같다. 친동기간의 우애는 바로 효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먼저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그 다음에 처자식이 있다. 삼국지 전체를 보더라도 그런 식으로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깊은가를 묘사하는 장면이 적지 않다. 부모에 효를 다하기 위해 한실부흥을 외쳤듯 역시 형제로서 의를 다하기 위해 죽은 형제의 복수에 나선다. 비극적 서사는 그를 통해 극대화된다.


반면 제갈량은 마찬가지로 유비와 매우 각별한 사이였지만 성격이 약간 달랐다. 유비가 관우, 장비와 만났을 때 그는 한낱 야인의 신분이었다. 아무 명분도 관직도 없이 군주를 자처하며 신하를 맞아들일 수 없으니 그들은 친혈육과 같은 형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과 만났을 때 유비는 이미 하나의 무리를 이끄는 수장의 신분이었다. 관우, 장비 말고도 조운과 손건, 미축, 미방 등 자신을 군주로서 섬기고 따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친구를 사귀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형제를 가지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유능한 신하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춰가는 조직에서 새로운 인물을 맞아들이려 할 때는 기존의 질서를 충분히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각별해도 유비가 제갈량을 대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신하에 대한 군주로서의 강한 신뢰에 지나지 않았다. 제갈량 역시 신하로써 군주인 유비에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강유가 실제 제갈량의 제자였는가는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제갈량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실제로 물려받기까지 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역시 '삼국지연의'에서는 강유를 제갈량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제자로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자신을 알아봐주고 자신을 위해 소중한 가르침까지 베풀었다. 마치 자식에게 하듯 죽음에 이르러 많은 것들을 물려주고 있었다. 스승의 마지막 뜻이 위를 멸하고 한실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었기에 원래 위의 영토인 천수 출신이었으면서도 어머니를 앞세운 위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후주 유선을 받을고 북벌의 의지를 불태운다. 장완 사후 비의의 견제와 비의마저 죽고 황호의 발호로 여러가지로 사정이 여의치 않았지만, 최소한의 병력만으로 곽회나 진태 등 위의 뛰어난 인재들과 겨루며 위기도 적잖이 겪었지만, 그러나 심지어 촉이 망하고 황제가 끌려가는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종회를 사주하여 반란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강유가 일으킨 반란을 검각에서 위군을 막던 도중 황제의 항복명령을 받았기에 죽을 곳을 찾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어차피 성공가는성도 없는 반란을 무리하게 일으키고 스스로 자살하듯 죽고자 뛰어든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확실히 민간전승을 거쳐 '삼국지연의'로 정리되며 의도적으로 더해진 설정들이 그래서 상당부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관우와 장비가 유비의 형제가 되었고, 강유는 제갈량의 제자가 되었다. 중심은 유비와 제갈량의 한결같은 군신관계다. 유비는 심지어 아들을 대신하여 제갈량에게 황제의 자리마저 물려주려 했었고, 제갈량은 그런 유비를 위해 죽는 그 순간까지 모든 노력을 아까지 않았었다.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북벌을 이루기 위해 몇 번이나 먼 북쪽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마침내 진중에서 죽고 말았다. 한왕실의 후손으로서 마지막까지 그 책임을 다하려 했던 유비와 제갈량의 제자가 되어 그 유업을 이루고자 했던 강유는 그렇게 하나의 일관된 줄기 위에 놓여진다. 효와 충과 공. 후손으로서 신하로서 그리고 제자로서. 군사부일체다. 그러고보면 딱 제갈량도 유비에게 아들뻘 되는 나이였다. 일찍 아들을 낳았으면 그 또래였을 것이다.


어쩌면 중국인들에게 삼국지가 중요하게 읽혀져 온 이유인지도 모른다. 중국인의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당연하게 삼국지를 읽고 삼국지의 이야기를 하고 삼국지의 인물들을 닮고자 노력한다. 누군가는 신이 되었고 누군가는 전설이 되었다.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그들이 추구한 가치에 집중한다. 그 의미를 이해한다.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있고, 군주는 신하를 믿고, 신하는 군주에 충성하며, 스승과 제자는 서로 가르치고 공경함에 아낌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니었을까? 문득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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