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로마의 황제들이 굳이 이집트로부터 로마로 밀을 배에 실어 날랐던 이유는 로마 시민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하는 일 없이 먹고 놀며 애낳는 일만 하는 잉여들이라 해도 그들은 로마 시민들이었다. 가진 것 없이 그저 황제만 바라보며 손을 벌리는 무지렁이들이라 해도 그들의 지지가 있어야 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정통성과 권위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굳힌 정통성과 권위로 로마 황제들은 마음껏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 의해 황제자리에서 내쫓일 때까지.

 

복지란 과연 시민의 권리인가? 아니면 권력의 시혜인가? 시민의 권리로써 마땅히 국가가 져야 하는 의무인가? 아니면 권력의 선의로써 국민에게 베푸는 은혜인 것인가?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권력이 그저 아무 조건 없이 선의로만 국민들에 굳이 자기의 부를 헐어가며 무언가를 베풀 이유가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렇게 국민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환심을 샀으면 그 다음은 무엇일 것인가? 복지와 포퓰리즘이 분리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를 통해 더욱 국민의 권리를 강화해 나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단지 권력자 개인의 욕망을 위해서만 쓰려 할 것인가?

 

포퓰리즘의 유래가 된 페론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도 대중에 영합하여 얻은 권력을 부정부패와 전횡과 독재를 가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론은 대중주의자이기는 했어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 차이인 것이다. 민주주의란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의 권리이고 의무이고 책임이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보편의 권리를 위해 반대급부를 요구해서는 안된다. 더 많은 지지와 그로 인한 더 큰 권력과 그에 뒤따르는 더 큰 부와 같은 것들이다. 대중의 마음을 사는 정책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쓴다면 그것은 진정 대중을 위한 것이겠는가. 그래서 시혜가 되는 것이다. 특정한 권력자가 대중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어떤 일들을 해주었다. 

 

바로 이 말이 핵심인 것이다. '해 준다'. 원래는 안그래도 되는데, 굳이 권력자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이루어준다. 그렇기 때문에 포퓰리즘에서 복지란 개인에 대한 숭배와 지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페론주의인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구성원들 사시에 합의된 보편의 상식과 가치와 정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페론 대통령 개인, 혹은 에바 개인의 선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만든 것은 페론의 부패와 독재를 문제삼아 쿠데타를 일으켜 내쫓은 이후의 정체세력들이 그 이상의 무엇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 더 클 것이다. 페론이기에 가능했다. 에바이기에 가능했다. 그들만이 진정 우리를 위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다시 불러들여 원래의 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수구진영에서 복지에 대해 반대할 때마다 바로 써먹을 수 있는 반박의 근거다. 대부분 복지정책들은 박정희가 먼저 시작했었다. 의외로 현대의 대부분 사회보장정책들은 독일제국의 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정부가 나서서 국민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면 기득권에 비판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나설 여지가 줄어들고 더불어 막 통일을 이룬 독일제국의 단합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박정희 시절이 살기 좋았다 추억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생활보호정책 덕분에 동사무소에서 받아온 쌀과 밀가루로 연명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는 것이다.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주어지는 의료보험증도 꺼리지 않고 받아주던 돌팔이 동네의원도 기억한다. 왜 그랬겠는가? 어쩌면 가난한 이들이 더 권위주의적인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없으니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더 많은 것이 아니더라도 알량하게 주어지는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정부정책에 의한 것이 아닌 개인의 동정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들이라도 그 차이를 깨닫기 힘들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 가난한 이들이 더 보수적으로 더 권위주의적으로 더 자유지상주의적으로 자유주의적인 보편적 복지에 더 반대할 수 있는 이유는 부를 독점한 이들이 알량하게 베푸는 자선에 있는 것이다. 저들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자신들을 위해서도 더 많은 돈을 쓸 수 있다. 물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는 돈보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을 가난한 이들이 지지한 결과로 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복지고 포퓰리즘인 것이다. 그래서 시민의 권리이고 대중에 대한 영합인 것이다. 결국에 포퓰리즘은 권위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다. 문재인 대통령이기에 노동자를 위해, 자영업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 오로지 문재인 대통령만이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무언가를 이루어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더이상 대통령따위 않겠다 해도 이래서야 대중에 의해 다시 끌려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다. 시민의 보편적인 권리여야 한다. 이명박근혜 시절을 돌이켜 보라.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지난 4년 좀 안되는 시간들을 되돌아 보라. 당시 언론들은, 정부와 여당은 무엇이라 떠들고 있었는지.

 

정의당이라서 해주는 것이 아니다. 정의당만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국민이 누려야 할 권리이고 정치권이 져야 할 책임이기에 정의당이 앞장서는 것 뿐이다. 바로 여기서도 정의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드러난다. 정의당과 자칭 진보들은 자신들의 선의를 대중이 알아주지 않는 것이 그리 서운하고, 민주당은 굳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어찌되었거나 이룰 것은 이루려 한다. 어째서 진보적인 대중 상당수가 정의당이 아닌 어차피 똑같이 한 줌에 불과했던 노무현과 문재인을 지지하여 뭉치게 된 것인가. 이념적으로 나같은 경우 노무현이나 문재인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도, 그래서 심지어 노무현과 문재인을 때때로 심하게 조롱하고 비난하기도 했음에도 끝내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정의당은 무산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정당이고, 친노친문은 당연한 시민들과 보편적인 과제들을 함께 해내가는 진영이기 때문이다. 친노친문이 자칭 진보들 보기에 극성맞을 정도로 적극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정의당과 민주당, 정확히 이제는 민주당의 주류가 된 친노친문의 근본적인 차이일 것이다. 엘리트주의와 진정한 대중주의다. 대중영합적 엘리트주의와 대중이 중심이 된 대중주의의 차이인 것이다. 그래서 때로 답답할 정도로 보편과 타협을 중시하기도 한다. 개새끼 씹새끼 욕하다가도 어느새 같이 손잡고 연대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그를 위한 과정이다. 민주주의란. 노무현이 무언가를 해주었다? 문재인이 무언가를 해 주었다? 그게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과제들을 그들이기에 대신해 이루어 준 것이다. 그래서 보편인 것이다.

 

하필 오세훈이가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바람에. 더구나 바로 직전 정의당이 정부의 거리두기 연장을 비판하는 논평을 보고야 말았다. 오세훈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리고 정의당이 정부의 거리두기 연장을 비판하며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법안들을 보았다. 무엇이 복지이고 무엇이 포퓰리즘인가? 무엇이 시민의 권리이고 무엇이 대중에 영합하는 것인가? 정의당이 내놓은 대안이라는 것이 과연 그같은 보편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인가? 원래 쓰려던 내용과 그래서 조금 벗어나고 말았다. 민주주의의 근본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어째서 복지이고 포퓰리즘인가?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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