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오해 가운데 하나다. 물론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족들이 자주 중국을 침략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북방 유목민족의 천적이야 말로 역대 중국왕조들이었다 할 수 있었다. 북방 유목민족의 기병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무려 수 천 년 넘게 그들을 상대로 싸우며 문명을 발전시켜 온 것이 바로 중원의 한족들이었었다. 북방유목민족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고, 그러므로 그들을 상대하여 이기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통해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대비해 왔던 것이 바로 그들 중국인들이었던 것이다.

 

실제 한무제의 흉노정벌 이래 중국왕조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는 동안에는 고작해야 변경에서 작은 약탈이나 있을 뿐 대대적인 군사적 침략 같은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었다. 오히려 역대 중국왕조들이 압도적인 인구와 생산력을 바탕으로 원정에 나서면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거나 아니면 아예 밀려서 근거지를 옮겨야 하는 일도 왕왕 일어났었다. 한무제에게 쫓겨 서로마까지 원정을 떠나야 했던 훈족이 그랬었고, 이후 초원의 지배자가 되어 중국왕조를 위협하다가 역시 떠밀려서 서아시아에 정착하게 된 투르크-돌궐 역시 그런 경우였었다. 어지간히 군주가 무능하거나 국정이 막장에 빠지지 않으면 아예 압도적으로 몰아내지는 못하더라도 쉽게 지지는 않는다. 당시 세계최강이던 몽골군을 상대로 가장 오래 치열하게 싸우며 버텼던 곳 역시 그래서 금에게도 쫓겨서 장강을 건너야 했던 남송조정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남송은 몽골군의 침략을 버텨낸 다른 문명들과 달리 금나라 바로 아래 몽골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몽골이 세운 원이 약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바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며 손쉽게 몽골군을 패퇴시킬 수 있었던 이유였었다. 몽골군 자체가 약해진 것도 있지만 그만큼 다시금 꺼내든 대유목민족 전술과 기술들이 효력을 발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원이야 원래 한족의 땅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천순제가 대도를 버리고 몽골고원으로 도망친 뒤에도 그를 쫓아 장거리 원정을 벌여 철저히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런 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황제와 조정이 정신만 바짝 차리고 있으면 중국왕조의 군사력이 생산력도 변변찮은 유목민족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단 것이다. 그래서 부패하고 무능했던 명왕조역시 아주 무능한 지휘관만 아니면 국경 정도는 얼마든지 유목민들로부터 지켜낼 수 있었다. 명의 멸망조차 사실상 부패한 정치에 분노한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 의한 것이었었고, 청군이 산해관을 넘은 뒤로도 남명조정과의 전투를 전담한 것은 여진족의 팔기군이 아닌 한족 출신의 녹번병이었었다. 청왕조가 건국되고도 준가르를 비롯한 유목민들과의 전투에서 역할을 한 이들 역시 전통적인 여진 출신의 기병이 아닌 한족 특유의 전술을 체득한 중국의 군대였었다. 숭정제가 최소한 선조 정도의 깜냥만 되었어도 청군은 절대 명을 멸망시킬 수 없었다.

 

그러면 중국민족들의 대기병전술이란 무엇인가. 일단 첫째 단기간에 쉽게 숙달시킬 수 있는 노궁을 고도로 개량하여 대량으로 배치한 뒤 주력으로 삼았고, 기병의 충격력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중무장한 병사들과 더불어 수레를 사용하여 기병의 충격력과 기동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했다. 바로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팔진도가 이같은 수레와 보병의 방진을 이용한 대기병진이었던 것이었다. 서진시대 마륭이 제갈량의 팔진도를 응용해서 단 3천의 병력만으로 선비족인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던 것도 원래 그 목적이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팔진도를 당대에 들어 개량한 것이 이정의 육화진이었고 역시 북송시대까지 대기병전술의 기본으로 정착한다. 아무리 유목민족들의 기마전술이 뛰어나도 상대적으로 인구나 생산력에서 뒤지는 만큼 병력도 무장도 열세일 것이기에 그 점을 우위로 삼아 철저히 물량으로 압도하는 전술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중무장한 기병까지 더해지면 유목민족들로서는 답이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삼국지에서 주변의 유목민족이란 일찌감치 퇴장한 공손찬에게도 썰려나가는 가련한 신세였을까.

 

기병이 그렇게까지 무적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만한 비용이 필요하고 또한 어느 정도 희생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워낙 인구가 많았으니까. 전쟁에서 어지간히 죽어나가도 그만큼의 인구가 바로 다시 채워지고는 했었다. 그 이상의 인구도 얼마든지 먹여살릴 수 있을 만큼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도의 기술문명 또한 양자의 차이를 벌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목민들이 농경민족을 이기기란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일찍부터 그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 중국의 한족이었던 것이고. 결론은 그럼에도 유목민에게 휘둘릴 정도로 역대 중국의 정치가 막장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 그대로였다. 중국인들이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아예 정치에 관심 자체를 가지지 않는다. 청대에 있었던 문자의옥으로 인한 영향도 작지 않을 테지만, 그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부패하고 무능한, 그래서 왕조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역대 조정들에 대한 불신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저놈들 믿느니 우리끼리 알아서 한다. 저 새끼들에 기대느니 그냥 우리들끼리 알아서 해결하고 본다. 그래서 지금도 유행하는 것이 중국 무협소설이란 것이다. 멀리 황제보다 바로 이웃한 우리동네 짱이 최고다. 중국은 약하지 않았다. 참 슬픈 역사의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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