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많은 시간 동안 여성은 철저히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주변부이자 타자로서 오로지 억압과 이용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해 오고 있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성욕조차 여성이기에 느껴서는 안되었다. 남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회활동마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문밖출입을 엄격히 통제당하고 있었다. 아직도 중동의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는 여성이 혼자 얼굴을 드러내고 바깥출입을 하는 것을 강한 금기로써 여성에 강제하고 있다. 여성은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며 오로지 남성을 위해서만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같은 사회적 강제와 금기를 거부하거나 거슬렀을 때 돌아오는 대가는 차라리 남성의 그것에 비해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잔혹한 처벌일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모든 여성들이 그같은 사회적 강요와 억압에 굴복하여 순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반역자들이 나타났고 그 가운데는 혁명가도 있었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회가 요구하는대로 모두가 인정할만한 훌륭한 여성이 되거나, 아니면 여성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들을 누리기 위해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거나. 흔히 말하는 여장부라는 것이다. 불과 얼마전까지 남성과 맞서는 당당한 여성이 되기 위해서 당연하게 입에 물어야 했던 담배와 같은 것이다. 머리도 짧게, 옷차림은 물론 말이며 행동마저 모두 남성처럼. 그것이 곧 남녀평등이고 여성해방이다. 여성이 일상적인 사회적 억압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성을 버리고 남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정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방법이었을 것인가.


하지만 어차피 그마저도 대부분 사회적 금기를 어기는 것이었고 그 대가는 무척이나 가혹한 것이었다. 남성중심 사회의 평가도 그다지 좋지 못했었다. 아주 오래전에도 많은 여성들이 일상의 시름을 잊기 위해 담배를 물고는 했지만, 정작 근대 들어 여성이 담배를 남성과 대등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자 여성의 흡연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달라지게 된 것이 그 단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무기력하게 그저 일상의 고단함을 잊기 위한 담배와 남성과 맞서기 위한 담배는 전혀 다르다. 심지어 길가다 말고 모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따귀부터 올려붙일 정도로 강한 적대감의 대상이었다. 담배만이 아니었다. 여성이 입는 바지며, 남성과 같은 말투나 행동들이 모두 '여자답지' 않은 일탈적 행위로 여겨졌었고 제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런 여성들 가운데는 남성에게마저 최소한 적으로라도 증오와 두려움이 대상이 되어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었다. 그 존재 자체가 금기가 되었다. 여성에게는 신화가 남성에게도 전설이 되었다. 때로 여성이지만 남성과 대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우월한 존재가 있을 수 있다. 부정한 왜곡과 치장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여성이지만 남성에게 충분히 위협적이고 두려운 대상이었다.


그러면 남성은 어떠했을까?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과 강제에 반발해서 여성은 남성이 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선택할 수는 있었다. 여전히 강한 사회적 금기가 가혹한 처벌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 가운데는 남성의 증오를 불러올 정도로 그 실력과 존재를 인정받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같은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더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여전히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로서가 아닌 그럼에도 이길 수 없다는 잘망이고 분노이고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미움받을 만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존재를 철저히 부정해야 할 만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은 어땠을까? 남성 역시 태어나는 순간 남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남성중심 사회로부터 강제당하고 있었다.


어려서 누구나 한 번 쯤 들었던 말일 것이다. 그런 짓 하면 고추 떨어진다. 남자가 그러는 것 아니다. 왜 남자는 그러면 안되는데? 남자도 소꿉놀이 하면 재미있고 인형놀이 해봐도 재미있다. 고무줄도 재미있다. 하지만 남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고 여자아이들 놀이가 따로 있다. 남자가 해도 되는 것이 따로 있고 남자가 해서는 안되는 것이 따로 있다.  남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남성이 그같은 사회적 금기와 강요에 반발해서 남성성을 버리고 여성이 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니까 처음부터 남성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이 되는 것은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사회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우월한 존재에 도전해서 그들과 대등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남성은 어떨까? 남성인 자신에 대한 사회적인 금기와 강요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오히려 사회적으로 열등하게 여겨지는 여성이 되고자 한다. 여성의 옷차림과 말투와 행동으로 여성과 경쟁한다. 그런 점에서 70년대 이후 특히 대중문화계에서 여성성에 도전하는 남성의 존재가 더이상 전처럼 금기의 대상은 아니게 되었다. 여전히 사회보편의 인식은 어떨지 몰라도 그 물꼬는 틔어졌다 봐야 한다. 오히려 90년대 이후 2000년대 들어서 사회가 더 보수화된 것은 아닐까.


바로 메갈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과 그들에 반대하는 극단적 남성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의 원인인 것이다. 메갈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들이 자기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여성성마저 부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여성성이야 말로 자신이 여성으로서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유인 것이다. 자신은 여성이어서는 안되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증오하는 남성의 그것이어서도 안되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대신할만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기라도 한가. 그냥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증오와 저항 이상의 어떤 가치도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남성들은 느끼지 못하는 그들만의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있다. 분노를 넘어 증오할 수밖에 없는 엄연한 현실이 그곳에 있다.


하지만 남성들은 메갈처럼 그렇게 하지 못한다. 남성으로서 자신들이 느끼는 세상의 부당함이나 부조리함도 이미 상당하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저항해야 하는지 남성 자신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남성성은 버릴까? 스스로 여성이 되어야 할까? 여성들은 여성성을 버려도 되지만 남성들은 남성성을 버려서는 안된다. 사실 그 자체가 남성과 여성이 가진 사회적 지위의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수 있는 것이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부당한 현실에 저항해야 한다. 남성이 남성인 채로 남성이 만든 세상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려면 결국 그만한 대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남성 자신이 아닌 남성인 자신을 이같은 부당한 상황으로 내몬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이겠는가?


한 마디로 비대칭적인 현실을 대칭으로 이해함으로써 생겨나는 오류인 것이다. 여성들은 그 사실을 알고 남성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정확히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는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남성인 자신을 억압하고 강요하는 그 모든 금기와 강제들이 사실은 남성인 자신들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메갈은 그런 점에서 훌륭한 핑계가 되어 주었다. 그동안 남성인 자신들이 보호하고 배려해야만 하는 약자로서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인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혐오스럽기만 한 부조리이자 악 그 자체였다. 저들 때문이었다. 마음놓고 책임을 돌려도 된다. 그러니까 메갈로 정의된 여성들이 이 모든 부조리한 현실의 원인이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 때문이다. 그 자체로 모순이고 부조리다. 우습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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