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지배가 폭력과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면 보다 고도화된 사회에서는 그를 거세함으로써 보다 합리적이고 안정적인 지배를 추구하고 있었다. 종교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정의했던 것이었다. 참아야 하고 견뎌야 하고 그럼에도 순종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너는 구원받지 못할 악의 종자일 뿐이다. 상대가 불합리한 폭력과 억압을 행사해도 진실한 신의 종이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근대 이후로는 신을 대신해서 도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리고 그 도덕이란 도덕을 지킬 수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나누는 장벽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마치 이전 시대에 신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고귀한 신분이 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이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던 것처럼 도덕의 선택을 받은 이들만이 고귀하고 우월하다. 그런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환경에 있는 이들만이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같은 욕망을 대체할 다른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이들만이 욕망을 거세한 도덕적인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하루종일 농사를 짓고 농사일이 끝나면 들어와 밥먹고 바로 잠들어야 하는 삶을 사는 농부와 하루종일 책을 읽고 시를 지으며 명사들과 고담준론을 즐기는 이들의 도덕적 기준과 가치가 서로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곳간에는 곡식이 가득하고, 매일 갈아입을 비단옷이 산더미같고,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맛난 것으로 챙겨먹을 수 있으면 다른 욕망 정도는 절제해도 좋은 것이다. 하긴 먹는 것도 아주 질좋고 신선하기까지 한 재료라면 굳이 설탕이네 소금이네 고춧가루네 자극적인 양념으로 그 맛을 가릴 필요가 없기도 하다. 원래 한국음식에서 고춧가루가 많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한국전쟁 이후 식재료의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변질된 맛을 가리기 위한 목적이 컸었다. 

 

여자도 마음껏 사귈 수 있고, 성매매도 아주 고급스럽게 법의 저촉을 피해가며 누릴 수 있는 놈들이야 리얼돌이란 그저 유흥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그럴 처지가 못되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리얼돌은 쓸데없이 값만 비싼 물건에 지나지 않기도 하다. 나더러 리얼돌 살 거냐 묻는다면 그 돈으로 컴퓨터나 업그레이드하겠다 말해주고 말겠다. 하지만 실제 여성을 만나지 않고 여성과 유사한 대상을 상대로 여성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은 한 편으로 그런 처지의 이들에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도 있구나. 그렇게도 욕망을 해소할 수 있구나. 나는 아니더라도 그런 방법도 있었다. 어차피 인간도 아닌 도구 아닌가. 나중에 진짜 아쉬우면 나도 한 번 써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안된다. 그건 악이다. 도덕적으로 불결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증거다. 한 번 딜도를 금지시켜볼까? 바이브레이터를 모두 금지시켜 버릴까? 여성도 역시 굳이 실제 남성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해소할 다양한 수단을 요구하는 편이다. 그런데 어째서 리얼돌만 안된다는 것일까? 실제 사람과 닮아서? 사람과 닮았을 뿐 사람은 아니다. 그 주장은 마치 최근 게임들의 그래픽이 실사와 거의 흡사하므로 게임에서의 폭력이 현실의 폭력과 이어질 것이란 주장과 다르지 않다. 실제 그따위로 떠드는 인간들이 있다. 맥락은 같다. 그러므로 폭력이란 욕망을 대리해서 추구하는 너희들은 열등한 존재다. 억압하고 통제해야 한다.

 

말 그대로 그 자체가 또다른 폭력의 욕망인 것이다. 대상의 욕망을 거세한다는, 그 과정에서의 억압과 통제라는 폭력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 폭력은 여성 자신의 것인가. 그래서 웃기는 것이다. 여성 자신의 힘이 아닌 남성의 폭력에 기대 그것을 이루려 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의 가장 큰 모순이다. 정확히 한국 여성주의의 모순이다. 여성 스스로 남성과의 투쟁과 타협과 협력을 통해 여성주의의 가치를 이루려 하기보다 일부 남성권력에 기대 그것들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래서 기생여성주의라 부르는 것이다. 저것들은 남성에 아양떨며 그를 배경으로 삼으려는 기생에 다름 아니다.

 

전제주의 시대 황제들이 그랬었다. 저 새끼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바로 죽어야했다. 마오쩌둥이 해로운 새라니까 중국에서 참새가 멸종되다시피 되어 버렸다. 내가 기분 나쁘니까. 사실 그게 진실이다. 이런저런 논리들을 가져다 붙이지만 그냥 리얼돌이라는 게 내가 보기에 기분이 아주 나쁘다. 아무것도 않고 어떤 반응도 없기에 그래서 더 마음놓고 실제 여성이 아닌 리얼돌을 선택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다. 여성이 리얼돌의 대체재가 아니라 리얼돌이 여성의 대체재다. 그렇게 자신이 없는가? 리얼돌과 자신들을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인가?

 

여성주의가 얼마나 오만해진 것인가? 나는 아직도 성매매나 포르노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이다. 그런 건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인격으로서 존엄을 훼손하는 것이다. 그런데 리얼돌은 다르지 않은가. 그런데 그마저도 용납할 수 없다. 현실의 여성이 아닌 가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욕망하는 것조차 용서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욕망을 가지는 것조차 인정할 수 없다. 그게 진실이다. 남성의 욕망을 거세하고 통제하며 억압하고 지배해야 한다.

 

여성이 권력이 되었다. 박원순은 그 시험대였다. 박원순의 삶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 가족까지 파괴해야 한다. 여성에게는 그럴 힘이 있다. 그래서 선택한다. 김병욱과 주호영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써 그 힘을 과시한다. 김학의의 무고함을 강조함으로써 그 힘을 확인시킨다. 그래서 이런 되도 않는 주장들이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그래도 되는 존재이고 그럴 힘이 이미 자신들에게 있다. 그런데 그 힘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인간은 욕망하기에 인간인 것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감정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그를 죄악시함으로써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 이른바 원죄론이란 것이다. 원죄란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는, 지배당해야 하는 타자이자 대상인 이유인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허무하기도 하다. 저 대가릿 속은 도대체 뭘로 채워져 있을까? 욕망을 억압하는 또다른 욕망인 것이다. 그래서 병신년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여성이란 그리 가치없는 존재가 아닐 텐데도. 버러지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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