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가 처음 일어날 때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궁리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부분 창업군주와 공신들은 유능하고 활력이 넘쳤다. 그런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 그 권력이 후대로 물려지면서 후계자들은 그런 궁리와 노력 없이도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이제까지의 결과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후기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더이상 성리학의 발전이 없었던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에 의한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오히려 조선의 성리학은 쇠퇴하고 후퇴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이제까지 해 온 공부이니 이대로도 좋지 않겠는가.

 

저들이 결국 다시 '멸공'을 들고 나온 이유일 것이다. 나는 얼마전까지 국민의힘의 정신적 퇴행이 박근혜의 유아적 독선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뀌었다. 박근혜란 원인이 아닌 단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오랜동안 저들의 지배와 독점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그저 부모 잘 만나고 시험만 잘 치르면 주어지는 당연한 권력이고 부고 명예였다. 그 순간 그들에게 더이상의 고민과 노력은 필요가 없어진다. 사고가 단순해지고 유치해진다. 내가 똥이라면 똥이고 떡이라면 떡이다. 판사들의 판결에서도 그런 퇴행을 발견한다. 이제까지 문제없었으니 앞으로도 문제없다.

 

그래서 결국 들고 나온 것이 수 십 년 전 쓰이던 구호인 '멸공'인 것이다. 그것도 국민의 선택을 받아 집권한 정부를 대상으로. 자신들과 다른 입장에 있는 정파를 상대로. 너희들은 공산당이니 모두 때려잡아야겠다. 그런데 그 공산당이란 정의를 누가 내리는가? 그리고 그렇게 정의한다면 누가 동의하고 따라줄 것인가? 하지만 상관없다. 자기들이 그렇다면 그렇다. 그리고 이제까지 이 방법은 매우 효과를 발휘해 왔었다.

 

말하자면 관셩인 것이다. 언론이 국민의힘의 편에 서는 것도 관성이다. 심지어 한겨레와 정의당조차 국민의힘이 정권을 잡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여긴다. 국민의힘이 아닌 다른 정파가 정권을 잡는 자체를 불편하게 여긴다. 사고가 마비된다. 그래서 본능처럼 관성이 시키는대로 따르게 된다. 거기에는 당연히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국민의 존재란 전제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이렇게 한 목소리로 선동하고 있으니 국민은 그에 따를 것이다.

 

선택의 기로다. 과연 국민들은 과거로의 퇴행을 선택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가능성에 걸어 볼 것인가? 하지만 인간이란 사유하기에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인간이 언제 늙기 시작하냐면 내일에 대한 희망이나 계획이 아닌 과거에 대한 추억과 향수에 더 기대기 시작할 때다. 인간의 뇌는 불확실한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 존재한다. 길을 걷는 동안에도 마주치게 될 수많은 장애물들을 극복하기 위해 뇌는 항상 기능한다. 앞으로 나가길 거부하면 뇌는 퇴화한다.

 

선거의 구도는 더 명확해졌다. 이해찬이 핵심을 짚었다. 나 역시 처음부터 말한 바 있었다. 과거로의 퇴행인가? 아니면 미래로의 전진인가? 왕조가 3대를 가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다. 병신은 답이 없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