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인데, 사실 동탁이 처음 낙양에 입성할 때까지는 그 세력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었다. 낙양에 입성할 당시 병력이 고작 3천이었고, 그래서 조카사위이였던 이유가 계략을 써서 허장성세까지 보여야 했었다. 그러던 동탁의 세력이 다른 제후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된 것은 낙양에 입성하면서 하진과 이어 정원의 통제 아래 있던 중앙군을 흡수하면서부터였다.

 

아마 삼국지를 읽으면서 그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동탁에게는 여포가 있었다. 그러면서 이각과 곽사도 있었다. 둘은 서로 영역이 달랐다. 겹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 다른 세력으로 동탁이 죽은 뒤 충돌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각과 곽사를 따르던 이들은 원래 동탁이 거느리던 서량의 군사력일 것이다. 그러면 여포는 무엇으로 동탁의 측근을 자처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어째서 왕윤과 이숙은 여포를 끌어들여 동탁을 죽이려 했는가?

 

이각과 곽사를 우습게 여기던 조조가 서영에게는 아예 껍질까지 벗겨질 정도로 쳐발린 이유인 것이다. 17로 제후군을 상대로 동탁이 동원한 것은 이각과 곽사가 이끄는 서량군이 아니었다. 여포와 서영이 이끌던 낙양군이었다. 여포가 이각과 충돌할 당시도 서영은 내부의 배신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함진영이라 불리던 고순의 역량과 충성심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이미 그에 대해 짧게 쓴 바 있었다.

 

이각과 곽사가 두려워할 정도로 동탁이 죽고 난 뒤 여포가 이끌던 중앙군은 서량군의 전력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 열세를 뒤집은 것이 바로 가후의 지략이었다. 그러고도 여포는 패잔병을 이끌고 천하를 떠돌며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그때 고순이 얻은 별명이 바로 함진영이었다. 정원이 하진에게 불려가 낙양군을 이끌었고 이후 여포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러면 대충 설명이 된다.

 

마초가 난리를 칠 때도 서량군의 전력은 조조가 이끌던 중앙군을 넘어서지 못했었다. 당연한 것이 당시까지는 아직 철갑으로 무장한 중장기병이 나타나기 전이었다는 것이다. 경무장한 기병을 상대로 한 한왕조의 전술은 후한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조조와 원소, 그리고 손권과 유비가 이민족들을 쳐바르고 다닌 이유였다. 그런 후한의 중앙군 앞에서 과연 서량군이 얼마나 위협이 될 수 있었을 것인가.

 

17로 제후군을 상대하는데 정작 서량군을 지휘하던 이각이나 곽사가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인 것이다. 여포와 서영은 원래 중앙군을 지휘하던 지휘관들이었다. 그래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한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서량군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동탁도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었다. 비장군이라 일컬어지던 여포의 무력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중앙군이 아직 여포를 따른다면 아직 지방군벌에 불과한 제후들이 그를 이기기란 어려울 터아.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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