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다른 신생독립국처럼 되지 않은 데에 이승만이 기여한 바를 꼽으라면 역시 한민당을 나와 자유당을 만든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신생독립국들에서는, 아니 일본을 비롯한 기존의 열강들 가운데서도 어느 특정한 정파가 정권을 독점하고 전횡을 저지를 때는 그 사회의 주류 기득권집단과의 결탁의 거의 필수적으로 선행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의 집권에 협력했던 독일의 융커와 자본가, 구귀족, 그리고 가톨릭교회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도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 역시 프랑코와 무솔리니의 독재에 협력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승만은 한민당의 주류였던 토호지주들과 등지고 친일관료집단과 결탁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의 지배는 불안했고 이는 박정희까지 이어지게 된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중앙의 행정력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지방에서는 소수 유력자들이 토호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지역행사에 정치인과 검찰, 경찰, 깡패가 나란히 참석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이는 이유도 그래서다. 방대한 토지와 자본을 소유하고 그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수 유력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질적일 수 있는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아직 중앙집권이 지금처럼 고도화되지 않은 해방직후에는 더욱 지역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비할 수 없이 컸었다. 이승만이 어울리지 않게 조봉암의 농지개혁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농지야 말로 이들의 기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이들과 완전히 척질 수 없었기에 유상몰수라고 하는 방법을 통해 적절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이승만의 독재가 노골화된 것은 이들 토호집단의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붕괴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다른 신생독립국들과 달리 한국은 중앙권력을 독점한 독재자와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야당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출발지점이 달랐을 것이다. 이승만이 조봉암은 죽일 수 있었어도 조병옥이나 신익희, 장면까지는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진보당을 만든 조봉암은 사법부를 이용해서 죽일 수 있었지만 이후 진보당을 해산하고 민주당으로 합류한 소장정치인들까지 감히 건드리지는 못했었다. 그것은 박정희도 마찬가지여서 아직 지역기반이 건재한 토호들은 그 성향과 상관없이 강력한 군사독재와 맞설 수 있는 야당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후 부산경남의 김영삼과 호남의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지역정치구도는 그런 연장에서 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승만 정권 말기 정부의 잘못으로 촉발된 4.19를 직접 경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아직 자기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방권력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국민이 들고일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여론도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에 미국까지 개입하고 있었다.

 

북한이 저 모양이 된 이유는 별 것 없다. 김일성과 김정일이 병신짓하는데 그것을 뜯어말릴 견제장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처럼 아예 목숨걸고 그 앞에 드러누워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이 북한에는 없었다. 북한만이 아니다. 중국 역시 마오를 중심으로 비타협적인 혁명원리주의를 추구했던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수 천 년 역사가 한 줌 잿더미로 변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때 우리보다 더 잘나갔던 필리핀 역시 마르코스의 장기독재로 말미암아 동력을 잃고 그저그런 저개발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박정희의 중공업우선정책이 실패로 돌아갈 듯하자 정권말기 아예 정권 내부에서까지 동요가 일어나며 끝내 독재자 암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승만이야 눈치보지 않고 지랄을 하다가 아예 내쫓기고 박정희는 그것을 교훈삼아 여론의 눈치라는 것도 봐가며 정치를 해야 했던 것이었다. 심지어 전두환조차 최소한 드러나는 모습 만큼은 국민의 여론에 신경쓰는 시늉 정도는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북한처럼 독재자라고 막나가는 상황은 최소한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아직 농업국가이던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기득권집단인 토호지주들과 결별한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어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주류기득권집단인 토호지주들이 중앙의 독재권력과 분리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 반대편에서 견제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의 목소리가 야당인 민주당에도 깃들 수 있었고 민주당이라는 이름 아래 보호받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 미국이 조금만 자극을 주면 어쩔 수 없이 독재자들도 그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김대중이 미국의 비호를 받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김영삼도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목숨만큼은 위협받지 않았었다. 다만 덕분에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기득권집단이 민주당의 방향을 결정하곤 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2찍들이 주장하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이승만이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일 것이다.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 주류기득권들과 결별하고 주변에서 겉돌던 친일관료집단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여전히 중앙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지방 기득권들을 적으로 돌리며 그들이 독재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으로 남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원래는 한 편이었어야 할 독재권력과 지방권력이 경쟁관계가 되면서 무모하게 독주하는 경우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니었다면 4.19가 가능할 수 있었을까. 김대중이며 김영삼이며 젊은 정치인들이 아예 대놓고 독재권력과 들이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1987년 시민의 힘으로 군사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냥 병신이란 것이다. 지 권력욕을 감당하지 못해서 괜히 일을 키운 멍청함에 대한미국이 빚을 진 것이다.

 

이승만 당시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가 어떤 식으로 낭비되고 있었는가 알면 감히 이승만을 들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 역시 중공업위주의 경제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와 낭비가 발생하며 자칫 1970년대 말 대한민국의 경제 자체가 붕괴할 위기에 내몰린 바 있었다. 부가가치세가 그래서 그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에 반발해서 부마항쟁이 일어난 것이었고. 현대가 조선소를 가지게 된 이유도 기껏 정부가 투자해서 조선소를 지어 놓고는 감당하지 못해서 억지로 떠넘긴 것이었다. 그 돈이 다 외국에서 들여온 차관이었다. 그러고도 말년에는 그렇게 자기가 키워 놓은 재벌과 측근들에 휘둘리며 아무것도 못하던 무능한 인간이 바로 박정희였었다. 그나마 김대중이 없었고, 김영삼이 없었고, 재야와 야당이 없었으면 당시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래저래 많은 사람들이 솔직해지고 있는 듯해서 요즘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영애는 버린다. 나얼도 잊는다. 하다하다 이승만을 추앙하며 그것을 아예 대놓고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이야. 이승만이 죽인 사람의 수가 김일성보다 조금 적은 정도다. 박정희보다도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도 폴포트보다는 적다. 오죽하면 조선총독부보다 이승만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며 독립무용론을 떠드는 2찍 진보새끼들까지 있겠는가. 그냥 버러지새끼들이다. 년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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