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도 모르던 시절에는 진짜 심각하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째서 우리 민족에게는 창세신화가 없는 것일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한민족만의 서사가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한때 환단고기에 이끌리기도 했었다. 어쩌면 그들이 주장하는대로 원래 우리 민족에게도 창세신화가 있었는데 유교화의 과정에서 망실되었고 일부 지역의 무가에 그 흔적이 남아 전해지게 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은 신화든 역사는 인류적인 관점에서 넓게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조선후기 유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논쟁이 이루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물성동이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성이 서로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과 대비되는 물物이라는 것이 사람 이외의 다른 동물이나 사물 정도가 아닌 문명화된 중화 이외의 다른 이민족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었다는 것이다. 중화를 이루었다면 사람인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중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야만족인 만주족 역시 사람이 아니기에 과연 그들에게도 사람과 같은 성이 있는가를 진짜 쓸데없이 심각하게 논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는 중국도 중화로 여겨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아닌 만주족이 지배하므로 중화는 이제부터 조선만 남게 된 것인가? 

 

그러면 과연 조선만 그랬을까? 19세기 교황청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한 바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사람이 될 수 있다. 즉 당시까지도 아메리카 원주민은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교회 입장에서도 사람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백인들의 학살과 약탈과 강간은 범죄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것들로부터 신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소중한 권리를 되찾는 숭고한 행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진짜 사람이 될 수 있었을지는 벌써 오래전에 개종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집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은 학살인데 집시는 학살조차 아니다. 오만가지로 욕을 들어먹는 히틀러와 나치지만 그러나 집시학살을 가지고 욕하는 사람은 오히려 드물 정도다.

 

아무튼 그런 맥락인 것이다. 유대인의 유일신인 야훼는 과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창조주인 것인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북유럽 등 세계의 수많은 창세신화에서 창조주들은 이 세계와 함께 모든 인간들을 함께 창조했던 것인가? 유대인들이 여리고성을 함각할 당시 대항하던 성민들에 대해 했던 행동들을 보면 최소한 유일신 야훼에게 있어 여리고의 성민들은 최소한의 연민이나 동정조차 가질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인류를 자신이 창조했다면 여리고의 성민들도 자신의 창조물일 텐데 어째서 그런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창조물일 블레셋 등 다른 이민족에 대해서는 그토록 적대적이고 잔혹하기만 했던 것일까?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래서 구약에서도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하느님이라고.

 

그러니까 모세와 약속하며 전한 십계명에서도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짜 신이 아니다. 신을 참칭한 존재가 아니다. 분명 자기 이외의 다른 신이라 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는 카인과 아벨이라는 아들들밖에 없었을 텐데,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쫓겨났을 때 야훼는 그런 카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지켜주고자 했었다. 야훼는 단지 유대인만의 신이었고, 더구나 유대인이 섬기던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였었다면 이 모든 의문은 한 방에 해결이 된다. 즉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여러 민족들과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러야 했던 유대인들이 필요에 의해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하여 유일신으로 받들기 시작했다면 이 모든 모순들이 설명되는 것이다.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리가 필요했기에 군신이던 야훼를 선택했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몰아주었으며, 그러므로 야훼는 단지 유대인의 신이었다. 야훼에게도 유대인만이 자신의 창조물이며 자신의 백성이었다. 그러니까 이민족들에 대해 그리 잔혹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야훼의 백성도 창조물도 아닌 그냥 이물이었으니까.

 

세계 대부분의 신화들이 그렇다. 아니 신화 이전에 대부분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이란 자체가 그랬었다. 서울을 벗어나면 모두 시골이라는 서울촌놈들처럼 자기들 이외에는 사람도 아니었고 문명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들만이 사람이었고 자신들이 이룬 것만이 문명이었다. 그 모든 것은 자신들의 창조주가 예정한 것이고 허락한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이 다른 민족을 침략하고 정복하고 학살하고 약탈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주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유럽의 백인들처럼.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도 수도 없이 학살과 약탈과 방화와 강간이 저질러졌지만 유럽의 백인들은 그것을 죄악이라 여기지 않았었다. 오히려 원래 자신들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을 무단으로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마저 느끼고 있었다. 과연 고대라고 달랐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아직 그 세계가 좁고 세계에 대한 인식도 얕았던 당시라면 더 나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비천하고 하잘 것 없는 존재들이다. 설사 자신들보다 앞선 문명을 이루고 있어도 자신들의 신이 예정한 바에 따라 곧 자신들의 지배 아래 들어올 하찮은 존재들이란 것이다. 그런 존재들까지 신이 자신들처럼 공을 들여 창조했을까? 저들의 신이 창조했을 것이고, 설사 신이 창조했어도 들판의 사슴이나 말처럼 자신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같은 것이었을 터다. 그래서 유대인의 신은 사람을 창조한 것이었다. 유대인에게 유일한 사람일 유대인을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창조했던 것이었다. 구약은 바로 그에 대한 이야기다. 유대인의 신인 야훼가 유대인을 창조하고 유대인에게 시련과 영광을 준 뒤 영원을 약속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그래서 유대인의 율법이고, 구약의 약속 또한 유대인을 위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등장한 것이었다. 야훼가 아닌 데우스라는 이름으로, 유대인만의 신이 아닌 모든 인류의 신으로써. 

 

복음서에 나오는 '가이샤의 것은 가이샤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귀절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이미 당시 예수의 세계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을 넘어서 로마가 정복한 모든 세계와 심지어 그와 맞서는 파르티아에까지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자신이 차별받던 갈릴리 출신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예루살렘과 대성전마저 로마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단지 작은 주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영광스러워하는 솔로몬의 제국보다도 더 거대한 세계가 아시아였고, 그 아시아마저 정복한 로마는 그보다 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며, 파르티아와 그와 군사적으로 대결하던 중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신 역시 그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과연 자신들의 신이 이 모든 세계와 인류를 창조했다면 신이 예정한대로 이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신을 배반하는 행동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즉 예수의 신약이란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과 약속한 구약을 벗어난 세계의 신이 세계의 인류와 맺은 새로운 약속이란 의미인 것이다. 비로소 유대인의 신은 유대인을 벗어나 세계의 모든 신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신이 될 수 있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신은 어느 누군가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어야만 했었다. 유대인의 신이 유대인의 왕과 유대인의 제사장에 의해 독점되었던 것과 달리 유대인을 벗어난 세계의 모든 인류, 대중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만 했었다. 초기 교회가 다시 구약을 불러들인 이유였었다. 새로운 종교지도자들인 주교들을 위해서도 필요했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의 보호자를 자처하게 될 황제를 위해서도 필요했었다. 사실 그래서 영지주의도 기독교를 전혀 엉뚱하게 이해한 이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소수에게 독점되는 비밀스런 것이 아닌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인 것이었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사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말 한 마디에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성직자에게 복종하라거나 교회에 충성하라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예수의 하느님은 세계의 하느님이고 전인류의 하느님인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예수 스스로 그렇게 실천하고자 했으니까. 이슬람의 하느님이 그런 것처럼 그렇게 유대인에게서 시작된 신은 세계로 나와 세계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런데 오히려 여전히 유대인의 구약시대에 갇혀서 설교하는 목사들은 뭐하는 존재들인 것인가. 유대인의 율법을 강조하며, 유대의 역사를 자기 역사처럼 배운다. 배척과 증오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를. 과연 지금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유대의 율법인가, 아니면 신약의 가르침인가. 예수의 것인가, 유대인의 것인가? 아이러니한 것이다.

 

결론은 단군신화에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없는 이유는 한 가지란 것이다. 이미 단군신화가 만들어질 무렵 조선인들은 국경 너머의 중국문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자신들과 다르지만 결코 그렇다고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문명과 그 문명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이웃해 있었다. 그렇기에 하늘의 선택을 받은 존재로써 자신들을 그들과 구분지으려 했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자신들의 군주는 자신들만을 위한 존재였다. 홍익인간도 결국은 세계 보편의 인간이 아닌 자신들의 인지가 미치는 영역 내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다. 인류를 이해하기란 아직 인간의 인식이 미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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