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대화 끝에 나이를 앞세워 어린 상대를 윽박지르는 것은 대화에서 주도권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어린 사람과의 대화에서 자신의 무지나 어리석음, 치우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어쩌나. 그로써 상대에게 우습게 여겨지고 권위를 잃게 되면 어쩌나. 그래서 어른은 나이를 앞세워 윽박지르고, 나이가 어리면 나이를 따라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이를 앞세운 순간 틀려도 틀린 게 아니게 되고, 그저 따르기만 한다면 자기 책임이 아니게 된다.

 

사전위탁보호제와 같은 제도는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논의될만한 사안일 것이다. 양부모가 아이를 입양하기 전에 위탁의 형식으로 함께 생활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면 입양을 취소하거나 혹은 새로운 입양아를 소개해준다. 한 편으로 아이를 대상화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한 편으로 그럼으로써 혹시나 입양 이후 서로 맞지 않아 벌어질 문제들을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사전위탁보호제에 대한 입장을 언론사마다 기자마다 정리해서 대통령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논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그런 제도가 입양아나 부모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냥 입양아들을 물건취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어째서 소득주도성장인가. 어째서 최저임금은 인상되어야 하는가. 어째서 근로시간은 단축되어야 하는가. 그런데 자칭 진보언론이 이들 사안들에 대해 자칭 보수언론과 논쟁을 벌이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세월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긴 자칭 보수언론도 거의 다르지 않았다. 저널리즘 토크쇼J가 언론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유인 것이다. 감히 언론을 상대로 비판을 하고 있다. 언론의 기사를 대상으로 논쟁을 하려 하고 있다. 기자들끼리는 논쟁하면 안된다. 언론사들끼리는 기사를 가지고 경쟁하려 해서는 안된다. 왜? 틀리면 망신이니까. 논쟁에서 지면 기자나 언론이나 큰 망신을 사는 것일 테니까. 그래서 아예 싸움을 회피하고 그 대상을 만만한 정부로 돌린다. 물론 그래도 되는 정부만 한정이다. 논쟁에서 지는 것이 두려운데 감히 권위주의적으로 언론을 대하는 대상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언론은 하나라는 것이다. 언론이라는 집단 안에 들어가면 그들은 다른 언론으로부터 비판받지 않아도 된다. 공격받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언론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엘리트라 그렇다. 워낙 좋은 집안 출신에 좋은 대학까지 나온, 항상 인정만 받아 온 엘리트들이라 그런 실패나 좌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실패도 아니다. 좌절도 아니다. 사회적 이슈에 대한 논쟁은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과 결론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틀렸어도 의미있는 결론을 도출했다면 그것으로 의미있다. 내가 졌어도 나 자신이 제기한 의제로 인해 사회가 가치있는 고민을 함께 했다면 그것으로 의미가 있다. 그보다는 논쟁에서 누가 이기고 졌는가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서 지식인으로서 논쟁의 한복판에 뛰어들기보다 구경꾼이 되고 심판이 되고자 한다. 그러니까 허구헌날 남 싸움붙이는 기사밖에 쓸 수 없는 것이다.

 

과연 언론의 비판이라는 게 일정한 주관이나 지향을 보이고 있는가. 없다. 어제 한 말 다르고 오늘 한 말이 다르다. 자기 입장은 없이 오로지 비판을 위한 비판만을 하고 있다. 내가 어떤 입장과 지향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부분을 비판하는 게 아닌 그냥 비판하는데만 의미를 둔다. 그래서 민주정부에 대해서만 날을 세우는 것이다. 비판하는 자신에 도취된다. 비판하는 언론이란 집단에 매몰된다. 그러니 대통령에게 뻐큐를 날릴 수 있는 자신은 대단하다. 기자들 뿌듯했을 것이다. 언론사 기자가 대통령에게 뻐큐를 대놓고 날릴 수 있는 시절이 되었다. 기자들이 이렇게 용감하고 대단하다. 당연히 그런다고 기자들을 어떻게 할 정부가 아닐 테니까.

 

빈약한 자아인 것이고, 엉성한 자존인 것이고, 그로인한 나약함과 비겁함인 것이다. 자신이 주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기 기사에 대해 비판을 듣는 것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기사에 책임을 지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논쟁하지 않는다. 한겨레와 조선이 논쟁하지 않고, 경향과 중앙이 논쟁하지 않는다. 그냥 따라간다. 그래야 다치지 않을 수 있다. 검찰만 따라가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 기레기는 기레기인가. 언레기는 언레기인 것인가. 논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론끼리 서로 비판도 감시도 논쟁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기자를 보호한다. 언론이 언론을 보호한다. 그래서 안에서 썩어들어간다. 기자가 기레기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놈들이 바로 기레기다. 맞는 말이다. 기레기를 거부하는 놈들이 기레기다. 그 이유를 설명한다. 엘리트중에서도 B급 엘리트다. 누가 저런 놈들을 엘리트로 인정하는가. 그게 또 하나. 그냥 병신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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