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주가 있는 기성언론들처럼 여성주의와 거리가 먼 존재도 없을 것이다. 당연히 마초 그 자체인 검찰조직이 여성주의와 가까울 수 없다. 성폭행마저 자체적으로 은폐하고 넘어가려 한 집단이 바로 검찰이란 것이다. 여성검사들을 대상으로 수도 없이 성범죄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그런 사실들이 외부로 거의 알려지고 있지조차 않다. 사주가 있는 기성언론들은 여성에 대한 가해자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과연 여성주의자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이들을 비판하고 있었는가. 아니 보수정당의 경우만 해도 수많은 성추문이 있었지만 그 태도는 지금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거의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나서서 조금의 이론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며 2차 가해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검찰과 언론과 협력하고 있는 지금에 비해 보수정당이나 언론, 검찰과 관련한 이슈에서는 단지 당사자만 조금 비판하고 마는 정도가 전부였었다. 그나마도 당이나 조직에서 조치를 약속하면 거의 바로 인정하고 물러나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보수정당에서 성추문이 일어났다고 대통령에게 입장표명을 요구하거나, 혹은 검찰내부에서 성범죄가 일어났다고 검찰총장의 사과까지 요구한 경우가 과연 있었는가. 장자연씨의 경우도 엄연히 가해자 가운데 보수언론 관계자가 있었음에도 그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왜이겠는가?

 

자칭 진보들이 보수진영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민주진영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일관하는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수는 그래도 된다. 왜? 기득권이니까. 저들이야 말로 지금 우리 사회의 정통성있는 지배세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규준이 되고 그 규준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저들의 동의와 허락을 받아내야 하는 것이다. 감히 저들을 거스르려 해서는 안된다. 반면 민주진영은 정통성없는 찬탈자에 지나지 않는다. 찬탈자이기에 더욱 엄격한 규준을 적용하여 저들의 자격을 심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왕의 아들은 단지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자격 없이 왕위에 오를 수 있지만 왕의 아들이 아니라면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시험까지 받아야 한다. 그러니까 보수권력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가며 관대하지만 민주정부에 대해서는 더 엄격하게 자격을 시험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보수권력과 입장을 같이 하며 그들로부터 인정받는 부수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당장 진중권만 하더라도 언제 진중권이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아 본 적 있었는가. 거의 모든 언론이 진중권의 말 한 마디를 받아쓰기 위해 그의 SNS에 상주하고 있을 정도다. 심지어 자사의 이름을 건 기사와 사설에서조차 진중권의 말들을 인용해서 근거로 삼고 있을 정도란 것이다. 진보정당이 가장 크게 높은 대우를 받을 때도 바로 민주정부를 공격하는 대열에 함께 하게 되었을 때였다. 지난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던 당시와 민주당에 보다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지금의 모습에 대한 언론의 태도를 비교해 보라. 그러니까 더욱 자신들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보수의 편에서 민주정부를 공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필요가 그들에게는 있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라고 다를 것인가.

 

제법 목소리도 크게 내는 여성주의자 가운데 사회적 약자라 할 만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할 수 있다. 거의 대부분 좋은 집안 출신에, 좋은 대학 나와서, 남들 부러워 할 만한 배우자에, 남들이 우러르는 직업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들이란 것이다. 아니더라도 여성운동을 통해 쌓은 명성으로 정치인이나 언론이, 지식인 등 그래도 저명한 사회의 고위인사들과 교류도 나누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박원순 시장도 이런저런 경로로 인연을 맺은 여성주의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곧 여성의 지위이며 여성주의의 현주소다. 그것은 그들의 진심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받는 대우야 말로 현실에서의 여성의 지위이며 권리다. 그러면 과연 그런 여성주의자들이 여성과 여성주의를 위해 연대해야 하는 것은 어디의 누구이겠는가. 진보를 자처하는 여성주의자 가운데 검찰이나 언론에 대한 개혁을 주장하는 이가 거의 없는 현실도 이를 반영한다. 오히려 검찰의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같은 여성 검사를 억압하려 할 뿐이다. 왜이겠는가.

 

지난 2012년에도 여성주의자들은 민주와 진보, 정의, 인권과는 거리가 먼 박근혜를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한 바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 여성주의자들이 여성대통령에 기대서 정부의 요직에 진출하기도 했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던 당시 역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탄핵의 부당성을 주장한 바 있었다. 여성 대통령 아래 자신들이 대우받던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남성 대통령이 집권한 지금보다 여성대통령이 계속 집권했으면 자신들의 처지가 조금은 더 낫지 않았을까. 김재련이 여성주의를 지금 대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재련 변호사를 중심으로 거의 모든 여성주의자들이 총궐기하는 상황이란 것이다. 언론과 검찰까지 함께 손잡고서.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과연 우연이겠는가.

 

언론이 힘을 실어준다. 검찰이 손을 빌려준다. 보수정치권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준다. 그 순간 그동안 여성의 인권을 위해 함께 해 온 시간들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과거의 동지마저 버려야 할 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금보다 여성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던 시절이 과거에 과연 있었는가. 이 모든 것이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주의가 나가야 할 바는 하나다. 기성언론과 검찰과 보수정치권과 손잡고서 기득권이 되어 정통성없는 찬탈자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진짜 여성주의를 위한 시대가 돌아온다.

 

기생페미니즘이라 말하는 이유인 것이다. 물론 시작은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권력에 기대려는 민주진영의 여성주의자들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기성언론에 기대고, 검찰에 기대고, 가부장적인 보수권력에 기댄다. 그들의 힘을 빌어 여성주의의 성장과 향상을 이루려 한다. 뒤바리나 퐁파두르가 누리던 지고의 지위와 권력이 마치 여성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대변하는 양 여기는 모습들이다. 그냥 기성 권력에 기대어 그 힘으로 찍어누르기만 하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논쟁하며 설득하고 공감을 이끌어내겠는가.

 

내가 얼마나 높은 사람과 가까운가. 내가 얼마나 권력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가. 권력이 얼마나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가. 얼마나 내 마음대로 그 권력을 이용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내가 말한 대로 그 권력이 움직이며 나 자신의 의지를 대신하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일제강점기 하층민 출신의 친일파들이 양산된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그렇게 완장을 찬 하층민 출신들이 많았었다. 연민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라도 않으면 어찌 그나마라도 권력이란 것을 누려 볼 수 있겠는가. 다만 당장 내가 성가시니까. 나에게 피해가 돌아온다. 당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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