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인터넷을 하다 보면 특정한 범죄보도에 대해 '판단을 보류하겠다'라는 반응들을 보게 된다. 누가 옳고 누가 맞는지 알 수 없으므로 지금으로서는 판단하지 않겠다. 얼핏 냉정하다. 무척 이성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결론나고 나면 그때 판단하고 평가하겠다. 하지만 과연 그 과정에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같은 이성과 냉정이 곧 정의일 수 있을 것인가.


성폭행 가해자가 있다. 피해자가 있다. 피해자가 억울함을 호소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꽃뱀이라며 비난한다. 개인의 사생활까지 들추며 비난하는 것을 넘어 협박까지 해댄다. 그런데도 사정을 알 수 없다. 누가 틀렸는지 알 수 없다. 실제 경찰이 그렇게 수수방관하다가 가해자에 의해 피해자가 이차피해, 심지어 살해까지 당하는 경우가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물론 가해자의 - 정확히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의 주장이 맞아서 피해자라 주장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무고한 것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 순간 판단에 의해 더 억울하고 더 고통스러울 것 같은 쪽은 선택하여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은 그럼으로써 더 큰 피해와 상처를 막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판단이 잘못되었다면 그 책임도 함께 진다.


내가 진중권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알든 모르든 일단 판단을 내리면 진흙탕이든 똥구덩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같이 뒹굴고 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 내가 맞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향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려 한다. 그리고 책임도 함께 진다. 진중권의 흑역사라 하는 것은 모두가 판단을 보류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시선을 돌리고 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뛰어들어 싸우려 했기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해도 나 역시 그래서 굳이 책임을 두려워해서 특정 이슈에 뛰어드는 것을 그다지 꺼리지 않는다. 다만 판단하기까지 정보가 부족한 만큼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일단 판단을 내리고 나면 그 모든 책임은 나 자신이 지는 것이다.


쿨한 것과 비겁한 것은 사실 종이의 앞뒷면과 같다. 그래서 포도밭의 여우로 자주 비유하고는 한다. 포도를 먹지 않는 것이 아니다. 먹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겁함을 이성과 냉정으로 어설프게 가리려 한다. 당장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있어도, 그 가족마저 큰 상처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러나 아직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그냥 지켜보겠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건장한 남성이 여성을 일방적으로 폭행하고 있다면 이유야 어찌되었든 먼저 말리고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두 사람 사이를 알 수 없으므로. 그래서 부부이고 연인이라면 일방적으로 폭행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틀린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과거 사회주의자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그것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설사 틀린 판단이고 결론이라 할지라도 일단 먼저 행동에 나선 순간 반성도 할 수 있고 잘못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렇게 판단해야 했던 합리적인 이유들은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틀리더라도 끝까지 계산을 포기하지 않았던 학생을 아예 틀릴 것을 두려워해서 계산 자체를 포기한 학생이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틀렸기 때문에 또다른 답도 찾아 나설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


여전히 인터넷은 여러 이슈들로 숨돌릴 틈이 없다. 이쪽이 옳다는 사람과 저쪽이 옳다는 사람, 그러므로 이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과 저쪽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사람, 그러면 그 과정에서 엄밀한 검증을 통해서 새로운 진실을 밝혀낼 수도 있다. 구경꾼들은 둘 다를 비웃는다. 자기는 중립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상처입는 일이 없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일부지만 태도가 남다르게 얄미울 뿐. 자기만 이성적이고 냉정하다. 비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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