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는 무치라. 절대권좌에 있다면 그 행동에 부끄러움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선조가 이순신을 죽이려 했을 때 류성룡이 그를 천거한 책임을 스스로 지려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순신을 천거한 것은 최초 정언신과 이산해가 천거했고, 임진왜란 직전에는 선조 자신이 역시 임진왜란에서 활약했던 정발, 박진 등과 함께 불차채용을 명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나마 불차채용되어 정읍현감으로 승진해 있던 이순신을 다섯 단계나 건너뛰어 유례없는 고속승진으로 전라좌수사에 앉힌 것도 선조의 독단이었었다. 사간원이 들고일어나 부당하다 상소했음에도 다 무시하고 승진을 유지하여 이순신은 조선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순신이 역적이 되어 버렸으니 그 책임을 선조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니 과거 녹도만호에 천거한 적 있던 류성룡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군주의 부끄러움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잘못 역시 잘못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군주에게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를 방치하거나 조장한 다른 누군가의 책임인 것이고, 군주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를 바르게 살피고 받들지 못한 주변에 있는 것이다. 아니면 군주가 한 행위이기에 그것은 부끄러움도 아니고 잘못도 아니어야 한다. 군주가 실수로 모자를 두 개 썼다면 신하들도 모자를 두 개 씩 겹쳐 써서 군주의 행위를 당연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찌 신하된 이로써 군주의 부끄러움과 잘못을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찬가지 이유에서 군주가 설사 논문을 표절하고 정당하지 못한 절차를 거쳐서 박사학위를 받았더라도 그를 따져묻는 것은 도리에 벗어난 것이다. 군주 자신이 아니라 그 배우자라도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대학따위가 군주의 부인께서 받은 박사학위와 논문에 대해 따져 물을 수 있는가.

 

20대 젊은 남성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아니 저들이 민주정부를 부정하는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공정이란 시험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필기시험을 통해서만 모든 권력과 부와 명예가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법시험은 그런 수많은 시험 가운데 가장 정점에 있는 시험이다. 그래서 공정사회를 위해서 20대 남성들은 아직도 사법시험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법시험에 어렵게 합격에서 오로지 소수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검찰권력이고 사법권력인 것이다. 감히 그를 넘볼 수 있는 것인가. 고작해야 대중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손에 넣었을 뿐은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나부랭이가 그런 검찰의 권력에 도전해서야 되는 것인가. 더구나 국민의힘은 굳이 시험따위 필요 없는 그동안 수 십 년의 세월을 정당한 지배자로서 대한민국을 지배해 온 세력인 것이다. 정의당이 국민의힘의 한 마디에 감격하며 오만 찬사를 가져다 바치는 이유다. 국민의힘이 어떤 잘못을 해도 감히 비판하지 못하는 이유다. 자칭 진보는 차라리 민주단은 비판할 수 있어도 국민의힘은 비판하지 않는다.

 

그런 맥락인 것이다. 정경심 교수의 보석은 불허되어도 윤석열의 장모는 얼마든지 보석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보석은 커녕 재판조차 부당하다. 부인 김건희씨의 논문도 그런 이유에서 여러 논란에도 기한이 지났다는 교육부 방침과도 어긋나는 되도 않는 명분으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고작 동양대 표창장으로는 그리 온나라가 난리를 쳐도 대학학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따져묻지 않는다. 조국 전장관과 관련해서 끊임없이 논평을 내던 정의당이 그래서 이번에는 철저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런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언론이 윤석열 검찰의 고발사주에 대해 정치공작이라며 프레임전환을 노릴 수 있는 이유다. 윤석열과 국민의힘이라면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무의식에 박혀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 말로 정당하고 옳다.

 

그래서 기득권인 것이다. 이 사회의 상식과 정의와 도덕과 윤리와 가치와 규범마저 오로지 사유화하며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다. 그렇게 스스로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보라면 진보고 보수라면 보수고 여성주의라면 여성주의다. 내가 성범죄라 했으니 성범죄고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 하면 아닌 것이다. 피해자의 눈물이 증거다. 정확히 내가 피해자라 인정한 사람이라면 그 눈물만으로 증거로 삼을 수 있다. 그런 카르텔인 것이다. 20대 남성들은 그런 카르텔에 자신들 역시 포함되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고. 어느새 그런 것들이 정의가 되어 버린다. 누구의 잘못일까? 그런 기자새끼들을 가르치고 길러낸 부모와 학교와 이 사회 전반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새끼들이 지식인입네 어디 가서 고상한 소리 떠들어댈 수 있는 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욕나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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