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대혁명기를 살았던 작가 마르퀴 드 사드는 지금도 문제가 되고 있는 자신의 여러 작품들을 통해 아주 놀라운 직관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인간은 단지 욕망을 쫓는가. 아니면 욕망을 추상하는가. 추상은 이성의 영역이다. 도덕과 양심과 정의를 판단하는 인간의 존엄이다. 그런데 정작 사드는 바로 그 이성을 통해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욕망을 추상하는 또다른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인간에게 이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성매매와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개인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적절한 수단을 통해 자유롭게 해소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어두어야 더 큰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성범죄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성적 욕망을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발산할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기에 일어나는 반작용이다. 과연 옳은가? 그렇다면 당장의 성적 충동과 욕망만 해결할 수 있으면 더이사의 추가적인 충동이나 욕망은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포르노를 보면서, 그리고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사창가 근처에서 성범죄는 더 빈번하게 일어난다.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들이기도 하다. 포르노의 합법화와도 관계가 있다. 성매매를 합법화했더니 오히려 수요가 늘어나면서 불법적인 성매매도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합법적으로 포르노가 유통되는 사회에서 불법적인 포르노 역시 함께 생산되며 유통되고 있었다. 인간은 욕망하지 않은 것을 욕망하는 재주가 있다. 욕망한 적 없는 것들마저 욕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상상력이다. 그것이 추상이다. 그것이 이성이다. 더 큰 욕망을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그래서 항상 궁리하고 새로운 답을 찾아 나선다. 하나가 충족되면 새로운 하나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의 타락 역시 끝이 없다.


과연 섹스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한 번이라도 섹스를 해 본 사람, 어느 쪽이 더 성욕을 억제하기 쉬울까? 당장 오늘 성매매를 통해 자신의 성욕을 해결했다. 직접적인 섹스라는 행위를 통해 성적 충동을 발산했다. 그러면 한동안은 어떤 충동도 욕망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부부사이에서도 어느새 찾아온 권태기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이 실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디 가서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부부라는 이름 아래 쌓여간다. 욕망을 가르친다. 물론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을 어디서나 쉽게 단지 돈만 있으면 타인을 수단으로 삼아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다.


묻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성매매가 합법화되었을 때 성매매여성들을 동등한 구성원으로, 성매매라고 하는 자체를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하고 존중할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대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불가능했다. 인간이 도구가 된다. 인간이 수단이 된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어째서 성매매업소 근처에서 더 성범죄가 자주 일어나는가. 포르노를 접한 사람들 가운데 성범죄의 발생빈도가 더 높은가. 그곳에서 여성은 수단이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다. 오로지 그로써만 존재한다. 포르노에 익숙한 사람치고 정상적인 여성관을 가진 경우가 드물다. 설사 성범죄가 사라지더라도 사회에는 또다른 계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멸시와 혐오가 당연한 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한때는 나 역시 성매매합법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어쩌면 나 자신은 성매매여성에 대해 전혀 차별없이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실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전의 문제다. 보다 다수의 일반의 문제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한 사회에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한다. 여성 또한 인간이어야 한다. 목적이며 존엄이어야 한다. 자신의 성욕을 위해서는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어떻게 하면 상대를 설득하여 자신의 욕망에 동의토록 할 수 있을까. 쉽다는 자체가 이미 상대를 존중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간을 자본의 대상으로 여긴다. 도구로서 객관화한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또한 자본주의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오랜 욕망의 정수다. 아무튼.

이를테면 몸무게 50킬로그램인 남성에게 몸무게 100킬로그램인 남성과 아무 조건 없이 링 위에서 정정당장하게 권투로 겨루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과연 5살짜리 여자아이와 20살 넘는 성인남성을 같은 조건 아래 아무 제약없이 시합하게 했을 때 그것을 공정하다 정당하다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같은 성인이더라도 20살 여성과 20살 남성을 같은 조건에서 시합시키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맨몸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프로격투기선수에 대항해서 여성이 손에 칼을 들었다면 그것을 부당하다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힘에서도 우월한 상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했다면 그것만으로 악의가 있었다 처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강자의 법과 약자의 법은 그래서 다르다. 강자는 가만히 있어도 이미 우월한 지위에 있기에 강자인 것이다. 약자는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열등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만큼 강자에게는 엄격하게 약자에게는 관대하게 규준을 적용해야만 한다.

여성주의가 얼핏 과격하게 보이는가. 흑인운동이 때로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은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는가. 퀴어축제에서 여러 성소수자들은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한다. 약자이기 때문이다.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해야지만 겨우 완고한 강자들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더 강하게 더 극성으로 더 비상한 수단을 동원하여 발버둥쳐야지만 겨우 자기에게 허락된 권리를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으라. 여성도 남성과 같이 행동하라. 점잖게. 얌전하게. 착하게. 성실하게. 온건하게. 하지만 막상 남성이 자신을 위협하려 하면 아무거라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이 여성인 것이다. 무기를 들고서도 감히 상대인 건강한 남성을 이기기는 커녕 막을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허세를 부리고 소리를 지른다. 거짓으로 협박도 한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같은 룰 아래 승부를 겨룰 한가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여성들이 저토록 강하게 남성들을 성토하는가. 정확히는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신체적인 남성의 우월함이다. 그럼에도 여성을 단지 성적 대상으로, 욕망의 분출구로 삼으려는 공격성이다. 남성이 자제해달라. 남성이 조심해달라. 조용히 말해서는 들어먹지 않으니까. 언제 한 번 남성들이 조용한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적 있는가.

평소 무시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쳐 왔었다. 이제 보니 왕왕 시끄럽다. 괜히 귀아프고 정신이 사납기도 하다. 내가 손해를 본다. 내가 피해를 본다. 내가 기분나쁘다. 여성을 철저히 타자화한다. 객관화한다. 잣대를 들이민다. 평가를 하고 채점을 한다.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기준으로. 여성은 공격적이다. 여성의 반응이 지나치다. 단지 내 관점에 의해서. 다른 것 없다. 내가 귀찮고 싫다. 아무튼.

혐오란 대상을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부정하는 것이다.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말과 행동을 오로지 자기에게 귀속시킨다. 자기가 판단한다. 자기가 결정한다. 종속된다. 여성들이 시끄럽다. 여성들이 지나치다. 여성들이 잘못알고 있다. 잘못 판단하고 있다. 어리석다. 한심하다. 나는 잘못 없다. 재미있다.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은 선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깡패들조차 무고한 사람을 때리고 협박하면서도 다 당하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는 한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오히려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믿는 것이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아있던 것들 중에는 희망과 함께 양심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흔히 생각한다. 혐오란 단지 싫어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라고. 물론 그런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싫어할 때 항상 단서를 단다. 이른바 '착한 타인론'이다. 전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거스르려 하지 않는 착한 누군가다. 착한 흑인, 착한 유대인, 착한 동성애자, 그리고 착한 여성... 내가 바라고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존재한다면 마땅히 나는 여성들을 지지할 것이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성실하고 바르고 온건한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나 역시 동성애자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전혀 타인이며 스스로 독립된 주체인 그들 자신이 어째서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금기다. 지금 이 선을 넘어서면 나는 당신들을 지지하지 않겠다. 당신들을 비판하겠다. 당신들을 공격하겠다. 그러니 이 선을 넘지 말라.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이다. 나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이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보호구역이다. 역차별론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만큼 자신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준다. 그런데 정작 정부가 정한 보호구역 안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존엄이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인정되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평가한다. 그냥 울타리다. 이 밖으로 나오지 말라.


저들이 하는 말들이 결코 여성에 대한 혐오일 수 없는 이유다. 이미 자신들은 여성들에 대해 기준을 제시했다. 자신들이 지지하고 동의해 줄 수 있는 한계를 정해주었다. 여성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이 제시한 그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여성의 잘못이며 여성 자신의 책임이다.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해서 비판하는 것이지 단지 여성이 싫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 여성에 대한 혐오는 없다.


주체가 아니다. 독립된 존엄한 존재가 아니다. 대상이다. 객체다.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강제할 수 있는 타자다. 그리고 그런 자체가 바로 혐오이고 차별이다.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도 같은 소리를 한다. 올바른 흑인은 인정한다. 사회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흑인들은 충분히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흑인들을 싫어한다. 흑인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있고 이유가 있다. 깡그리 무시한다. 오로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자기가 이미지화한 흑인만이 바른 흑인이다.


여성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저마다 나름의 원인과 이유가 있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도 보이는 것이다. 모두는 자기의 경험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다. 내면화 한다. 주체로써 인정하고 스스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이유와 자기의 동기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에 옮기는 주체여야 한다. 인정하지 않는다. 바른 여성은, 바른 인간은 오로지 자신이 만든 이상적인 이미지 안에 있다.


무엇이 혐오인가. 무엇이 차별인가. 어째서 남성들은 여러해전 '루저'라는 단어 하나에 그토록 분개하고 있었던 것인가.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경멸당하고 무시당했다. 한 여성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남성의 개별적 차이가 무시되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키 큰 사람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의미가 있다.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가치를 오로지 타인이 결정한다. 내가 타인을 일방적으로 정의한다.


나는 여성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나는 여성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아하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성은 현실의 여성인가. 현실의 모순되고 부조리한 때로 납득되지 않는 입체의 여성인가. 영상에 여성은 없다. 사진이나 텍스트에도 여성은 없다. 그것들은 철저히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가공된 이미지일 뿐이다. 실제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그들만이 여성이다. 무엇이 진정한 여성인가. 진심으로 묻는다.


맞다.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체 살인사건 피해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다. 작년 한 해 동안 미수까지 포함해서 남성 피해자가 511명인데 반해 여성피해자는 402명에 불과하다. 무언가 억울하다. 실제 가장 강력한 범죄인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남성이 더 많지 않은가.


그런데 위 주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다. 실제 인용한 경찰청 통계에도 바로 뒤에 한 가지 통계가 다시 뒤따르고 있었다. 바로 살인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통계였다. 당연하다. 피해자만 존재하는 범죄란 없다. 가해자가 있으니 범죄다. 피해자만 있으면 사고다. 미제사건조차 단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 누군가 가해자가 있기에 사건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 전체 살인범죄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은 어떻게 되는가.


놀라지 마시라. 무려 83.5%다. 전체 살인범죄자 1024명 가운데 무려 855명이 남성이었다. 여성은 169명이 전부였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살인사건이라는 중대한 범죄에 있어 성별비대칭성을 보여준다. 최소한 여성에 의해 남성이 살해당하는 것보다 남성에 의해 여성이 살해당하는 경우가 산술적으로도 더 많다. 남성피해자의 경우도 대개는 남성인 범인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냥 단순이 남성이 여성보다 살인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해서일까? 아니면 남성이 여성보다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아서일까?


어떤 범죄든 마찬가지다. 아니 범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요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은 상대와 자신과의 우열관계다. 상대의 반발이나 저항을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을 때 상대에게 불리한 행동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결심도 계획도 가져볼 수 있다. 하다못해 무기를 따로 장만한다거나,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린다거나, 그렇더라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형제가 범죄예방에 도움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범죄 역시 자신이 범인인 것이 밝혀지지 않을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자기가 잡힐 것을 알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겨우는 매우 드물다.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열세인 여성이 남성을 살해하고자 마음먹게 되는 경우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반대로 같은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더 자제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하는 충동이나 욕구가 있을 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려는 내적 동기가 얼마나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계인 것이다. 여성이 그러고 싶다고 남성을 폭행하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남성이 스스로 여성의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여성은 신체적으로 열세이기에 남성의 반격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강도사건의 경우도 전체 2087건 가운데 압도적인 1908건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무기를 들었든 어쨌든 상대를 위력으로 제압할 자신이 있기에 강도로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를 든 상태에서도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할 자신이 없으면 망설이게 된다. 상대를 제압하더라도 무사히 현장을 탈출할 자신이 서지 않으면 주저하게 된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야만상태에서의 신체적 우열이 범죄의 비율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대부분의 범죄의 추세는 사회적 신체적 심리적 강자에 의해 저질러지며 그 대상은 상대적 약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절대다수는 남성이 남성을, 혹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범죄들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살인사건에 있어 남성이 여성에 대한 잠재적인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전제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물리적 위력의 열세로 인해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더 그같은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불어 어째서 강력범죄에는 남성피해자가 압도적인 폭행은 들어가지 않는 것인가. 단순폭행이거나 쌍방폭행은 사실 강력사건이라 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전체 폭행사건 가운데 남성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비율이 무려 84%, 67%다. 사건의 피해정도 역시 피해없음으로 분류된 사건이 68%에 이른다. 대부분은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단순폭행에 불과한 것이다. 성범죄의 경우도 그 절대다수는 경미하다 할 수 있는 성추행이지만 차이라면 대개 위력을 동반하여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권력이 강하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존엄과 권리는 회복될 수 없다. 범죄의 동기나 성격에서 차이가 분명하다. 더구나 설사 폭행을 강력사건에 집어넣더라도 폭행의 가해자 비율에서도 여성은 고작 15.7%에 불과하여 32.9%에 이르는 피해자의 비율과 대조를 이룬다. 그냥 산수만 해도 전체 폭행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남성과 여성인 경우가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폭행사건조차 사실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가해를 증명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남성인 가해자의 수가 남성인 피해자의 수보다 많다. 반대로 여성인 가해자의 수가 여서인 피해자의 수보다 적다. 물론 이해한다. 남성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행의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굴욕과 수치심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성폭행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지. 명백히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죄인처럼 가해자에게 숙이고 살아야 하는지. 성범죄는 강력범죄가 아니다. 폭행도 강력범죄로 포함해야 한다. 사소한 성추행조차 위력를 동반해 저질러지며 여성의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다. 폭행에 있어서도 남성은 여전히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남성도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가해자의 비율은 여성보다 더 높다. 남성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까지 살해한다. 강도나 폭행과 같은 범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 피해자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가해자들이 바로 남성이었다. 남성이 남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며 여성을 상대로도 범죄를 저지른다. 여성의 경우 가해자의 수가 피해자보다 항상 훨씬 적다. 과연 범죄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일방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통계로서 부족한가. 바보라서 사람들이 그 통계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알고 있다. 알면서도 비열하게 인용하는 것이다. 필요한 부분만 따로 떼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써 사실을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의 성비가 남성이 더 높음에도 단지 피해자인 남성만을 일률적으로 피해자 여성과 수로써 계량한다. 통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 그야마로 남성이 여성보다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르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아직까지 인터넷문화의 주류는 남성이며 같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최소한 동조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혁명가이거나 바보다.


어째서 살인의 피해자 가운데 남성이 더 많은데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가. 가해자 가운데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다른 모든 강력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이 더 많이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피해자가 되고 있다. 여성피해자가 가해자의 수보다 훨씬 적다. 숫자가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근거는 될 수 있다. 부정하기 위해서는 더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인가. 물론 아니다. 내가 아니니까. 그러나 모든 남성 가운데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유의미하게 존재하는가. 최소한 통계는 그렇게 가리키고 있다. 그 피해자 가운데 여성이 일방적으로 선택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 경험으로 획득한 상식이다.


모든 참고자료는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했다. 범죄통계를 따로 PDF로 정리한 것이 있으니 다운로드 받아서 찬찬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차라리 비열하기를 바라야 할까. 멍청하기를 기대해야 할까. 말이 통하지 않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아예 알아듣지 못하거나.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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