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은 결코 대칭적이지 않다. 평등하지 않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다 관대한 도덕적 기준이, 어떤 사람에게는 보다 엄격한 도덕적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결국 공평하지 않은 도덕을 그나마 공정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에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어지간히 불리한 선택을 해도 기본적인 우월함으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다. 반대로 약하다는 것은 그만큼 선택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비정상적인 수단을 동원해서야 겨우 상대에 너무 뒤지지 않을 수 있다. 키만 2미터가 넘어가고 손에 칼까지 든 강도를 상대하면서 정정당당을 따진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겠는가. 총을 들고 협박하는 살인자를 상대로 가족을 인질로 삼는다면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가. 다수의 적을 상대로 모래를 끼얹고, 함정에 빠뜨리고, 뒤에서 기습을 한다. 모두 정당하다.


온건한 수단을 사용해서 상대의 이해와 공감을 구하는 것은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일 경우에나 가능한 것이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하다 보면 언젠가는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온건하다는 자체가 결국 상대에게 자신은 맞춰가는 것을 뜻한다.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수단에 대해 상대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맞춰 하나둘 양보하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에게 길들여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 전문용어로 순치라 부른다. 상대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하며 오로지 상대가 이해와 공감을 베풀기만을 막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다. 원래의 의도는 상대의 반응에 따라 완전히 종속되어 버린다. 선택도 결정도 오로지 내가 아닌 상대의 판단에 달렸다.


일제강점기 온건주의 노선을 걷던 독립운동가들이 어느 순간 대부분 친일파로 전향해 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기는 그 순간에도 많은 온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조선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위한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을 도와야 한다. 일본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 일본이 고마워서라도 자신들을 달리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맞서싸워봐야 상대가 안되니까. 싸울 수 있는 수단이란 이미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저 일본의 자비에 기대어 일본의 인정이 조선과 조선인들을 돌아봐줄 날만을 막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독립의지는 사라진다. 그 자체가 이미 일본에 종속된 식민지의 현실 그 자체였을 테니까. 불관용과 비타협을 앞세운 상대와의 온건주의란 그래서 한계가 명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도 그동안 많은 온건한 여성주의자들이 있었다.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의 눈높이에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들 자신이 만든 보편작 사고와 가치에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굳이 크게 다투거나 싸우는 일 없이 모든 것을 순리에 따라 천천히 진행하고자 한다. 물론 그 주된 목적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그 주체라 할 수 있는 남성의 이해와 공감이었다. 그들의 호의였다. 그렇게 느리지만 조금씩 여성들을 위한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왔다. 분명 성과였다. 그런데 정작 그 결과가 그나마 알량한 여성주의의 성과에 대한 남성의 비아냥과 적개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성의 당연한 권리주장마저 무시하며 여성주의마저 남성에 종속시키려 시도한다면? 남성이 보기 좋은 여성주의란 남성을 위한 여성주의다. 여성주의는 여성을 위한 것이다.


벌써 오래전이다. 어느 여성주의 논쟁에서 한 여성주의자에게 남성은 이 논쟁에서 빠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도 어차피 남성이지 않은가. 똑같은 남성일 뿐이다. 여성의 문제는 여성 자신이 해결한다. 여성의 문제는 오로지 여성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것이다. 서운할 정도로 냉정하던 그 말의 뒤에는 그같은 시리도록 자조적인 짙은 절망과 체념이 묻어 있었다. 남성의 이해를 구해서는 안된다. 남성의 공감을 구해서도 안된다. 남성과 싸워야 한다. 남성과 싸워서 여성이 남성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남성이 타협하고 양보할 수밖에 없음을 직접 인식시켜야 한다. 일깨워야 한다.


메갈리아라는 사이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에 있어 메갈리아는 일종의 상징이다. 어째서 많은 여성들, 여성주의자들, 여성주의에 우호적인 지식인들이 이토록 메갈리아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가. 메갈리아 역시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약자인 여성이 자신을 주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일베와는 다르다. 일베는 기득권에 더 가깝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한 비주류가 주류의 흉내를 내는 곳이다. 비주류의 목소리지만 그들의 주장에는 이 사회 기득권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강자와 약자의 도덕은 분명 다르다 말했었다. 허용의 범위가 다르다. 메갈리아를 옹호한다 해서 메갈리아가 한국사회의 주류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주장이 당장 현실이 될 수도 없다. 하물며 그보다 더 약하고 영향력도 없는 보다 온건한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그럼에도 그런 주장들을 하는 이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벌써 여러해 전이다. 장애인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시위를 했던 적이 있었다. 도로를 점거하고 구호를 외치며 정부에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그를 비판하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네티즌 역시 그에 적대적이었다. 불편하다. 시끄럽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아무에게도 불편끼치지 말고 조용하게 시위하도록 하라. 실제 그렇게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장애인들의 목소리는 그나마 비판적 기사로조차 다루어지지 않았다. 남성들이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는다 해서 남성들이 바라는대로 양보만 계속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성들이 바라는대로 온건하고 착실한 투쟁만을 한다면 여성주의는 과연 이 땅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정확히 메갈리아를 옹호한다기보다는 어떻게 해도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희망도 기대도 가질 수 없는, 그럼에도 막연한 기대로 점차 순치되어 정체를 잃어가는 현실에 대한 반발일 수 있다. 메갈리아라고 하는 사이트 자체가 아닌, 그런 주장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배경들에 대한 공감이다. 남성은, 그리고 남성들이 만든 지금의 사회는 이해와 공간의 대상이 아니다. 대화와 타협의 대상도 아니다. 극복과 저항의 대상이다. 투쟁과 타도의 대상이다. 혁명가가 된다. 온건한 수단으로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과격한 수단 뿐이다.


메갈리아가 어떤 사이트인가를 따지는 것은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시작은 특정한 몇몇사람이 했어도 결국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그리로 이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인 것이다. 어째서 메갈리아에 비판적이면서도 메갈리아와 함께일 수밖에 없는가. 어째서 배울 만큼 배웠고 남들보다 똑똑하기도 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메갈리아의 편을 드는 것일까. 그러면 메갈리아가 나타나기 전 그들은 여성주의에 대해 우호적이었는가. 메갈리아가 아니었다면 메갈리아에 비판적인 다수 네티즌들은 여성주의자의 편에서 여성주의를 위해 싸울 수 있었을 것인가.


불통의 사회가 만든 비극이다. 서로를 향해 총과 자살폭탄테러를 주고받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와도 닮았다. 온건주의는 설 곳을 잃는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메갈리아가 시작이 아니었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여성 자체에 대한 비하와 멸시로까지 이어졌다. 작용은 반작용을 부른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이미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남성이란 단지 자신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함께 대화하고 이해를 구할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다. 남성과 여서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산다.


회의적인 것이다. 메갈리아가 아니라면 여성주의는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인터넷에서 여성은 그나마 지금보다 더 존중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남성들은 여성을 다르게 보게 될 것인가? 절대 그럴 리 없을 것이기에 어느새 메갈리아에 이끌리는 여성도 늘어난다. 어느새 인터넷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 심지어 그것을 감추려는 최소한의 시도조차 안보이는 남성들의 속내가 여성들을 메갈리아로 등떠밀어 보내고 있다.


남성은 적이다. 여성은 차라리 적조차 아니었다. 차라리 적이기를 바란다. 메갈리아에 가지는 유일한 불만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이고 악이기를 선택하라. 정작 남성들이 만든 논리와 가치의 뒤에 숨는다. 자신들은 원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관용과 배려를 바라며. 비겁하다. 최소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의 자살폭탄테러범들은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 목적을 이루고자 한다. 그들은 과연 자신의 신념을 위해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일베사냥에 이어 메갈사냥이다. 강자라는 자신감이다. 사회의 룰을 자신들이 정한다고 하는 자존감이다. 그럼에도 여성은 약자일 수밖에 없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 순종해야만 한다. 끝이 없다. 답은 명확하다.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 무엇이 원인이고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한 걸음만 물러서면 되는데, 역시 이 경우에도 대칭성은 적용되지 않는다. 보다 우선해야 하는 주체가 있다.


어차피 메갈리아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이해하고 일정부분 공감하며 아마 대부분은 이해도 공감도 못할 것이다. 너무 이질적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다고 배척하지 않는 것은 그런 대상도 한국사회와 같이 극단으로 기운 사회에서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 때문이다. 늦었다. 아직 너무 뜨겁다.

이를테면 몸무게 50킬로그램인 남성에게 몸무게 100킬로그램인 남성과 아무 조건 없이 링 위에서 정정당장하게 권투로 겨루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과연 5살짜리 여자아이와 20살 넘는 성인남성을 같은 조건 아래 아무 제약없이 시합하게 했을 때 그것을 공정하다 정당하다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같은 성인이더라도 20살 여성과 20살 남성을 같은 조건에서 시합시키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맨몸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프로격투기선수에 대항해서 여성이 손에 칼을 들었다면 그것을 부당하다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힘에서도 우월한 상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했다면 그것만으로 악의가 있었다 처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강자의 법과 약자의 법은 그래서 다르다. 강자는 가만히 있어도 이미 우월한 지위에 있기에 강자인 것이다. 약자는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열등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만큼 강자에게는 엄격하게 약자에게는 관대하게 규준을 적용해야만 한다.

여성주의가 얼핏 과격하게 보이는가. 흑인운동이 때로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은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는가. 퀴어축제에서 여러 성소수자들은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한다. 약자이기 때문이다.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해야지만 겨우 완고한 강자들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더 강하게 더 극성으로 더 비상한 수단을 동원하여 발버둥쳐야지만 겨우 자기에게 허락된 권리를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으라. 여성도 남성과 같이 행동하라. 점잖게. 얌전하게. 착하게. 성실하게. 온건하게. 하지만 막상 남성이 자신을 위협하려 하면 아무거라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이 여성인 것이다. 무기를 들고서도 감히 상대인 건강한 남성을 이기기는 커녕 막을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허세를 부리고 소리를 지른다. 거짓으로 협박도 한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같은 룰 아래 승부를 겨룰 한가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여성들이 저토록 강하게 남성들을 성토하는가. 정확히는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신체적인 남성의 우월함이다. 그럼에도 여성을 단지 성적 대상으로, 욕망의 분출구로 삼으려는 공격성이다. 남성이 자제해달라. 남성이 조심해달라. 조용히 말해서는 들어먹지 않으니까. 언제 한 번 남성들이 조용한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적 있는가.

평소 무시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쳐 왔었다. 이제 보니 왕왕 시끄럽다. 괜히 귀아프고 정신이 사납기도 하다. 내가 손해를 본다. 내가 피해를 본다. 내가 기분나쁘다. 여성을 철저히 타자화한다. 객관화한다. 잣대를 들이민다. 평가를 하고 채점을 한다.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기준으로. 여성은 공격적이다. 여성의 반응이 지나치다. 단지 내 관점에 의해서. 다른 것 없다. 내가 귀찮고 싫다. 아무튼.

혐오란 대상을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부정하는 것이다.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말과 행동을 오로지 자기에게 귀속시킨다. 자기가 판단한다. 자기가 결정한다. 종속된다. 여성들이 시끄럽다. 여성들이 지나치다. 여성들이 잘못알고 있다. 잘못 판단하고 있다. 어리석다. 한심하다. 나는 잘못 없다. 재미있다.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은 선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깡패들조차 무고한 사람을 때리고 협박하면서도 다 당하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는 한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오히려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믿는 것이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아있던 것들 중에는 희망과 함께 양심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흔히 생각한다. 혐오란 단지 싫어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라고. 물론 그런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싫어할 때 항상 단서를 단다. 이른바 '착한 타인론'이다. 전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거스르려 하지 않는 착한 누군가다. 착한 흑인, 착한 유대인, 착한 동성애자, 그리고 착한 여성... 내가 바라고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존재한다면 마땅히 나는 여성들을 지지할 것이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성실하고 바르고 온건한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나 역시 동성애자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전혀 타인이며 스스로 독립된 주체인 그들 자신이 어째서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금기다. 지금 이 선을 넘어서면 나는 당신들을 지지하지 않겠다. 당신들을 비판하겠다. 당신들을 공격하겠다. 그러니 이 선을 넘지 말라.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이다. 나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이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보호구역이다. 역차별론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만큼 자신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준다. 그런데 정작 정부가 정한 보호구역 안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존엄이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인정되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평가한다. 그냥 울타리다. 이 밖으로 나오지 말라.


저들이 하는 말들이 결코 여성에 대한 혐오일 수 없는 이유다. 이미 자신들은 여성들에 대해 기준을 제시했다. 자신들이 지지하고 동의해 줄 수 있는 한계를 정해주었다. 여성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이 제시한 그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여성의 잘못이며 여성 자신의 책임이다.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해서 비판하는 것이지 단지 여성이 싫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 여성에 대한 혐오는 없다.


주체가 아니다. 독립된 존엄한 존재가 아니다. 대상이다. 객체다.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강제할 수 있는 타자다. 그리고 그런 자체가 바로 혐오이고 차별이다.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도 같은 소리를 한다. 올바른 흑인은 인정한다. 사회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흑인들은 충분히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흑인들을 싫어한다. 흑인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있고 이유가 있다. 깡그리 무시한다. 오로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자기가 이미지화한 흑인만이 바른 흑인이다.


여성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저마다 나름의 원인과 이유가 있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도 보이는 것이다. 모두는 자기의 경험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다. 내면화 한다. 주체로써 인정하고 스스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이유와 자기의 동기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에 옮기는 주체여야 한다. 인정하지 않는다. 바른 여성은, 바른 인간은 오로지 자신이 만든 이상적인 이미지 안에 있다.


무엇이 혐오인가. 무엇이 차별인가. 어째서 남성들은 여러해전 '루저'라는 단어 하나에 그토록 분개하고 있었던 것인가.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경멸당하고 무시당했다. 한 여성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남성의 개별적 차이가 무시되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키 큰 사람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의미가 있다.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가치를 오로지 타인이 결정한다. 내가 타인을 일방적으로 정의한다.


나는 여성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나는 여성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아하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성은 현실의 여성인가. 현실의 모순되고 부조리한 때로 납득되지 않는 입체의 여성인가. 영상에 여성은 없다. 사진이나 텍스트에도 여성은 없다. 그것들은 철저히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가공된 이미지일 뿐이다. 실제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그들만이 여성이다. 무엇이 진정한 여성인가. 진심으로 묻는다.


맞다. 일부 남성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전체 살인사건 피해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높다. 작년 한 해 동안 미수까지 포함해서 남성 피해자가 511명인데 반해 여성피해자는 402명에 불과하다. 무언가 억울하다. 실제 가장 강력한 범죄인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남성이 더 많지 않은가.


그런데 위 주장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다. 실제 인용한 경찰청 통계에도 바로 뒤에 한 가지 통계가 다시 뒤따르고 있었다. 바로 살인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통계였다. 당연하다. 피해자만 존재하는 범죄란 없다. 가해자가 있으니 범죄다. 피해자만 있으면 사고다. 미제사건조차 단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을 뿐 누군가 가해자가 있기에 사건은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면 전체 살인범죄자 가운데 남성의 비율은 어떻게 되는가.


놀라지 마시라. 무려 83.5%다. 전체 살인범죄자 1024명 가운데 무려 855명이 남성이었다. 여성은 169명이 전부였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살인사건이라는 중대한 범죄에 있어 성별비대칭성을 보여준다. 최소한 여성에 의해 남성이 살해당하는 것보다 남성에 의해 여성이 살해당하는 경우가 산술적으로도 더 많다. 남성피해자의 경우도 대개는 남성인 범인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냥 단순이 남성이 여성보다 살인에 대한 욕구가 더 강해서일까? 아니면 남성이 여성보다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더 많아서일까?


어떤 범죄든 마찬가지다. 아니 범죄가 아니라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요하려 할 때 가장 먼저 고려되는 것은 상대와 자신과의 우열관계다. 상대의 반발이나 저항을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을 때 상대에게 불리한 행동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결심도 계획도 가져볼 수 있다. 하다못해 무기를 따로 장만한다거나, 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린다거나, 그렇더라도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형제가 범죄예방에 도움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범죄 역시 자신이 범인인 것이 밝혀지지 않을 것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자기가 잡힐 것을 알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겨우는 매우 드물다. 신체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열세인 여성이 남성을 살해하고자 마음먹게 되는 경우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반대로 같은 경우 남성이 여성보다 더 자제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고자 하는 충동이나 욕구가 있을 때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그것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려는 내적 동기가 얼마나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통계인 것이다. 여성이 그러고 싶다고 남성을 폭행하기란 사실 매우 어렵다. 남성이 스스로 여성의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 이상 여성은 신체적으로 열세이기에 남성의 반격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강도사건의 경우도 전체 2087건 가운데 압도적인 1908건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다. 무기를 들었든 어쨌든 상대를 위력으로 제압할 자신이 있기에 강도로 나설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기를 든 상태에서도 상대를 확실하게 제압할 자신이 없으면 망설이게 된다. 상대를 제압하더라도 무사히 현장을 탈출할 자신이 서지 않으면 주저하게 된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양심적이어서가 아니라 야만상태에서의 신체적 우열이 범죄의 비율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대부분의 범죄의 추세는 사회적 신체적 심리적 강자에 의해 저질러지며 그 대상은 상대적 약자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절대다수는 남성이 남성을, 혹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저지르는 범죄들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살인사건에 있어 남성이 여성에 대한 잠재적인 가해자일 수 있다는 전제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물리적 위력의 열세로 인해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면 여성은 남성보다 더 그같은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불어 어째서 강력범죄에는 남성피해자가 압도적인 폭행은 들어가지 않는 것인가. 단순폭행이거나 쌍방폭행은 사실 강력사건이라 보기에 어려움이 있다. 전체 폭행사건 가운데 남성인 가해자와 피해자의 비율이 무려 84%, 67%다. 사건의 피해정도 역시 피해없음으로 분류된 사건이 68%에 이른다. 대부분은 남성과 남성 사이에서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단순폭행에 불과한 것이다. 성범죄의 경우도 그 절대다수는 경미하다 할 수 있는 성추행이지만 차이라면 대개 위력을 동반하여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공권력이 강하게 개입하지 않는다면 피해자의 존엄과 권리는 회복될 수 없다. 범죄의 동기나 성격에서 차이가 분명하다. 더구나 설사 폭행을 강력사건에 집어넣더라도 폭행의 가해자 비율에서도 여성은 고작 15.7%에 불과하여 32.9%에 이르는 피해자의 비율과 대조를 이룬다. 그냥 산수만 해도 전체 폭행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남성과 여성인 경우가 상당한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폭행사건조차 사실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가해를 증명하는 근거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남성인 가해자의 수가 남성인 피해자의 수보다 많다. 반대로 여성인 가해자의 수가 여서인 피해자의 수보다 적다. 물론 이해한다. 남성은 여성이 아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성폭행의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굴욕과 수치심을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성폭행피해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지. 명백히 피해자임에도 오히려 죄인처럼 가해자에게 숙이고 살아야 하는지. 성범죄는 강력범죄가 아니다. 폭행도 강력범죄로 포함해야 한다. 사소한 성추행조차 위력를 동반해 저질러지며 여성의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사실이 아닌 것이 아니다. 폭행에 있어서도 남성은 여전히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남성도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 있지만 가해자의 비율은 여성보다 더 높다. 남성이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까지 살해한다. 강도나 폭행과 같은 범죄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성 피해자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가해자들이 바로 남성이었다. 남성이 남성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며 여성을 상대로도 범죄를 저지른다. 여성의 경우 가해자의 수가 피해자보다 항상 훨씬 적다. 과연 범죄에 있어 남성과 여성의 일방적인 관계를 설명하는데 통계로서 부족한가. 바보라서 사람들이 그 통계를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알고 있다. 알면서도 비열하게 인용하는 것이다. 필요한 부분만 따로 떼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써 사실을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의 성비가 남성이 더 높음에도 단지 피해자인 남성만을 일률적으로 피해자 여성과 수로써 계량한다. 통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 그야마로 남성이 여성보다 범죄를 더 많이 저지르는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아직까지 인터넷문화의 주류는 남성이며 같은 남성들이 자신들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최소한 동조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확신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혁명가이거나 바보다.


어째서 살인의 피해자 가운데 남성이 더 많은데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여기는가. 가해자 가운데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다른 모든 강력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남성이 더 많이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피해자가 되고 있다. 여성피해자가 가해자의 수보다 훨씬 적다. 숫자가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근거는 될 수 있다. 부정하기 위해서는 더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범죄자인가. 물론 아니다. 내가 아니니까. 그러나 모든 남성 가운데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유의미하게 존재하는가. 최소한 통계는 그렇게 가리키고 있다. 그 피해자 가운데 여성이 일방적으로 선택될 가능성도 그만큼 높다. 그것은 이미 사회적 경험으로 획득한 상식이다.


모든 참고자료는 경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했다. 범죄통계를 따로 PDF로 정리한 것이 있으니 다운로드 받아서 찬찬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차라리 비열하기를 바라야 할까. 멍청하기를 기대해야 할까. 말이 통하지 않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아예 알아듣지 못하거나.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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