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고종에 대해 평가할만한 부분이 어차피 망할 나라 저항없이 순순이 넘긴 덕분에 희생이라도 줄일 수 있었던 점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 물론 그래도 나라를 지켜보겠다고 일어섰던 의병들의 희생을 무시했을 때 가능한 말이다. 나라와 임금인 자신을 지켜보겠다고 목숨걸고 나섰던 그들을 고종은 외면했고 폭도로 몰았고 토벌명령까지 직접 내렸었다. 수많은 의병과 인근의 백성들의 죽음마저 철저히 개죽음으로 내몰아가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희생이란 무엇일까?

 

그래서 결국 조선에 돌아온 것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는 무단통치였었다. 만만했을 테니까. 우스워 보였을 테니까. 나라 하나를 집어삼키는데 이렇다 할 싸움 한 번 없이 거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아무런 희생도 피해도 없었다. 오히려 대부분 조선의 지배층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의 지배에 협력하며 나서고 있었다. 조선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 조선인들은 그냥 내키는대로 자기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그런 일본의 태도가 극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 3.1운동을 겪고 나서부터였다. 이대로 마음대로 하다가는 진짜 더 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한 번은 힘으로 눌렀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면 당시 일본의 힘으로 조선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기란 어려워진다. 그래서 바뀐 것이 바로 문화통치였었다.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전혀 두렵지 않은 상대를 이유없이 먼저 알아서 존중해주는 경우란 없다고 봐야 한다. 동정이나 연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신기함과도 역시 전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역사상 중국의 여러 왕조들은 항상 한반도의 왕조를 두려워했었다. 남북조를 통일한 수와 당이, 심지어 수나라의 경우는 아예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왕조가 망해버린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송을 두렵게 만들던 거란의 요가 고려를 침략했다가 아예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그래서 명초기에는 혹시라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해 올까봐 긴장했던 흔적마저 남아있을 정도다.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우려 출전했던 장수와 병사들을 통해 조선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명의 조선에 대한 태도는 완전 표변해 버린다. 조선은 자신들이 긴장할만큼 대단한 나라가 아니다.

 

사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이 무리하게 추진했던 민족말살정책도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상당히 순치된 상태였음에도 조선인들이 만에 하나 미국과 전쟁중인 자신들의 뒤에서 3.1운동 당시와 같은 봉기를 일으킬 것을 두려워했다. 모든 전력이 미국과의 전선에 가 있는데 과연 그런 경우 조선에 주둔중인 병력만으로 조선인들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아예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만든다. 이전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인종적으로 전혀 다른 존재이기에 어떻게 해도 서로 같아질 수 없다. 조선인이 일본인처럼 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여기에 넘어간 이들이 이른바 민족개조론을 부르짖던 조선인 지식인들이었다.

 

현실을 직시하라. 대세를 거스르지 마라. 그래서 한 번 싸우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넘겨준 것이 구한말 지배층들이었다. 일본에 맞서려는 이들을 준엄하게 꾸짖는 것을 넘어 일본의 힘을 빌려 짓밟고 있었다. 그렇게 얻은 일본의 자비가 강제병탄이었고, 무단통치였었다. 그리고 그런 일본을 바꾼 것은 역시 되도 않을 3.1운동이라는 봉기였었다. 그때도 이완용은 말했었다. 무모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래서 과연 어땠는가.

 

그냥 100년 전 떠들어대던 말들의 판박이다. 그때도 그랬었다. 구한말,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다. 일본은 열강이고 우리는 아직 근대화도 이루지 못한 약소민족이다. 그러니 일본을 거스르기보다 참고 인내하며 힘을 기르자. 그래서 결국 이르게 된 결론이 일본인이 되자. 그때 그렇게 주장하던 이들의 후예가 지금 다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일본은 우월하고 우리는 열등하다. 그러므로 절대 일본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한국정부는 그리 마음대로 비판하더나 혹시라도 일본의 심기를 거스를까 조심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감상이란.

 

우리가 일본을 함부로 적대해서 나라를 빼앗겼다? 대세를 모르고 함부로 강자와 적대하다가 나라를 잃고 말았다? 언론과 정치인, 지식인들이 그리 떠드니 그냥 그대로 믿어 버리는 사람도 나온다. 그래도 싸웠으니 열강들이 조선을 독립시킬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오키나와와 함께 패전한 일본이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던 것이 조선인데 열강의 힘으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누가 진짜 어리석은가. 역사는 여전히 정체되어 있는 것인가. 덥기만 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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