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차라리 지겨울 정도로 많은 무협소설에서 단골처럼 쓰여 온 소재중 하나인 정난의 변 당시 황제이던 건문제가 남경에서 죽지 않고 살아서 도망쳤더라는 이야기는 사실 영락제가 자신의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린 프로파간다에 가까웠다. 정난이라는 말 자체가 어지러워진 정국을 바로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는 만큼 영락제 역시 봉기를 일으키면서 내세운 명분이 황제를 에워싸고 있는 간신들을 제거하여 천하를 바로세우겠다는 것이었기에 당연하게 신하로서 감히 황제인 건문제를 군사를 일으켜 죽이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되었던 때문이었다.
사마의가 망탁조의의 하나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역적의 대명사로 불리며 욕을 먹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다름아닌 아들인 사마소가 신하로써 자신의 황제를 백주대낮에 찔러죽인 사실 때문일 것이다.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하로써 자신의 황제를 죽이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패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적국의 왕일지라도 유선이나 손호에서 볼 수 있듯 어찌되었든간에 작위를 주어 예우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었고, 하물며 원래 자신이 섬기던 황제라면 죽이더라도 일단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다른 죄를 물어 죽이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졌었다. 그랬음에도 항우는 자신의 왕이었던 의제를 죽였다고 수 천 년 넘게 욕을 들어 먹었었다. 그런데 영락제는 심지어 그 황제가 자신과 피를 나눈 조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영락제도 건문제가 사실은 살아 있다면서 그를 찾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반역을 일으킨 자신을 향한 세간의 반감을 의식해서 원래 근거지였던 북경으로 천도하고 나아가 정통성을 과시하겠다고 쓸데없는 북벌이나 일삼았던 것이었다. 당시 명의 상황이나 이후 북경이 황도였기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영락제의 천도가 얼마나 병신짓이었는가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물며 수양대군은 아무리 양위하고 폐위되었어도 한때 자신의 왕이었던 조카를 직접 죽이기까지 했었다. 도대체 왜? 왕을 폐위하고 유폐만 한 뒤 죽을 때까지 내버려두는 경우가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예에서 보듯 아예 없지는 않았다. 건문제의 아들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둘째가 천순제 때까지 살았다가 유폐에서 풀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수양대군은 굳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기까지 해야만 했던 것일까?
당연하게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었다. 일단 첫째가 사육신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막연하게 자기도 세종의 아들이고 능력이 아주 없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대신들을 제외한 집현전 학자 등 조정의 주류들과 꽤나 친분이 있었기에 일단 왕위만 차지하면 끝날 줄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던 부분이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자신과 원래 친분이 있었던 집현전 학자들마저 자신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고 단종의 복위를 시도했다는 사실이 하나 충격이었고, 처음부터 자신과 적대했던 안평대군 말고도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또다른 형제인 금성대군 또한 끝까지 단종을 위해 복위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또 하나 위협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도덕적 정치적인 부담을 감수해가며 단종을 끝내 사사해야 했던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실록에도 자살이라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당시에도 대부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째서 자살했는데 시신을 거두는 것조차 벌받을 일이 되었는가 하는 정황증거까지 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조선이 아닌 바로 인접한 다른 나라의 역사에서 어쩌면 수양대군이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었다. 다름아닌 에센에 포로로 잡힌 뒤 폐위되었다가 다시 탈문의 변을 통해 즉위하게 되었던 천순제의 이야기였다. 어려서부터 자신을 돌보았던 환관 왕진의 꼬임에 넘어가 토목보에서 에센에게 포로가 되어 폐위되었던 정통제가 다시 즉위하여 천순제가 된 것이 바로 1457년 2월, 딱 단종이 죽기 9개월 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순제가 다시 이미 황제로써 중국을 다스리고 있던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지지자들에 의해 복위될 수 있었던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직전 경태제의 아들인 태자가 죽어 후계가 불명확해진 점이었었다. 경태제의 뒤를 이을 태자가 죽었으니 다른 황족으로 후계를 대신해야 할 텐데 그럴 것이면 이전 황제인 정통제도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당시 조정의 기회주의자들이 그 틈을 노리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조선에서도 단종이 죽기 1달 좀 전에 세조의 세자이던 의경세자가 급사하고 있었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시도되어지는 단종에 대한 복위시도, 그런데 자신의 후사를 이을 세자가 급사한 상태에서 중국에서 이미 한 번 폐위되었던 황제가 다시 그 지지자들에 의해 즉위하는 사건마저 일어난다. 세조가 세자인 의경세자가 죽자 그 아들인 세손이 아닌 둘째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 이유였을 것이었다. 자신이 왕위를 찬탈한 명분이기도 했었고 혹시 모를 반역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장성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후계를 튼튼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단종의 죽음이 세조 자신에게도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명분에 큰 타격이 되었는지 이후로도 세조는 자신이 찬탈을 후회하는 듯한 연기를 해 보임으로써 자신에 대한 반감을 희석하기 위한 시도를 이어가게 된다. 세조가 진정 반성했으면 단종의 무덤을 그리 방치해서도 안되는 것이었고, 단종의 남겨진 왕비나 후궁들을 그리 고통스럽게 내버려두어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조는 말만 그러했을 뿐 실제로는 자신이 저지른 패악을 바로잡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랬어야 했던 이유라는 것이다.
조선이란 어찌되었거나 명분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이념부터가 성리학이었고, 신진사대부들이 조선을 건국한 이유 또한 성리학의 이념에 기반한 이상국가를 세우고 싶은 욕망에서였었다. 심지어 수양대군이 찬탈하고 수 백 년이 지난 뒤에까지도 당시의 사대부들은 단종을 동정했고 그의 복권을 끊임없이 추진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민심은 말할 것도 없다. 신숙주의 후손들이 지금까지도 세조 즉위의 정당성을 설파하고자 운동하는 이유가 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자신이 섬기던 왕이던 심지어 피붙이인 조카를 죽였다는 것은 꽤나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그렇게 했다. 어째서? 여러 해석이 있을 테지만 하필 때가 그렇게 맞아떨어졌다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필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비슷해 보이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명분없는 불안한 왕위였다는 뜻도 된다. 한심한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