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말한 바 있지만 차별이라는 것이 무작정 상대를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혐오란 감정 역시 그저 상대가 싫다고 밉다고 거부하는 감정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싫고 미운 것도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억압하고 무시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착한대상론이다. 착한 흑인, 착한 게이, 착한 레즈비언, 혹은 착한 여성 같은.


이상적인 모델을 전제한다. 자기가 생각하는 착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순종적인 훌륭한 대상의 모델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너는 이같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거부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싫어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따라서 배제하는 것도 역시 정당하다. 아무리 백인우월주의자라도 자신에 순종적인 흑인노예까지 싫어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을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근거로서 내세우는 것도 같은 여성이 되는 것이다. 보아라, 이런 훌륭한 여성들은 너희들과 같은 허튼 소리나 짓거리를 안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너희가 '틀린'거다.


다만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남성들은 최근 부쩍 여성들을 그토록 혐오하게 된 것일까. 정확히 자기주장이 강한 여성들에 대해 증오의 감정마저 가지게 된 것일까. 어제 쓴 글에 답이 있다. 남성들은 남성으로써 살아남기 위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오히려 가부장적 사회이기에 남성에게 지워진 사회적 책임은 여성의 그것보다 훨씬 무겁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부모도 봉양해야 하고, 형제들도 건사해야 하고, 가정을 이루어 가족도 부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려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부분 남성들에게는 그래서 여성들과 다른 이유로 직업선택의 자유같은 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아마 IMF 전까지는 여성들을 배려해도 좋을 정도로 남성들의 사정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직 일자리도 많았고 수입도 적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주장에 일일이 반박하는 것도 남자답지 않다는 편견 또한 자리했다. 남자라면 당연히 여성과 아이와 노인을 배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특히 IMF를 기점으로 사정이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장 여성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허락하기 전에 남성들 자신부터 그같은 기회를 누릴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게 되었다. 당장 여성의 채용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남성들 자신부터 과연 채용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자리는 정해져 있는데 이전에는 같은 남성들과만 경쟁해야 했는데 이제는 여성과도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같은 출발선에서 같은 조건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기에 받는 사회적 배려가 마치 특권처럼 여겨진다. 심지어 인터넷상에서는 대학입시등과 관련해서 저소득자나 농어촌 등 소외된 지역에 대한 배려조차 특혜이자 역차별이라며 분노하는 주장마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모두는 동등한 조건에서 같은 출발선에서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 그 안에 내재된 또다른 불평등과 차별은 배제한 채 당장 눈에 보이는 공정성만을 시비삼는다. 여성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더 고약한 것은 다른 경쟁과는 달리 여성의 경우는 여성 자신이 남성의 입장에서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갈수록 남성 자신의 처지는 열악해지는데 여성들은 더 많은 권리와 지위를 요구하고 있다. 그 말은 곧 보잘것없어진 자신이 여성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 것임을 의미한다.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 선택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지만 여성의 지위가 지금보다 낮아지면 거꾸로 자신이 여성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미투에 대한 남성들의 반발 역시 그같은 연장선에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수동적인 여성을 바라는 원초적인 본능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이 자신의 성을,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결국 모든 것은 역시나 특히 다수의 젊은 남성들에게 사회적인 여건이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 현실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당장 내가 아쉽고 급한데 여성의 처지까지 생각할 여유따위 없다.


그래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오히려 남성들 자신이 동등해지기를 원한다. 사실은 시험이다. 과연 여성이 남성과 같아질 수 있을 것인가.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똑같이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못하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직장에서는 남성이 더 필요하고 사회적으로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중요한 존재다. 하지만 여기서도 모순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여성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남성 혼자 벌어서 가계를 부양할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는 이유다. 그런 현실을 남성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단순한 열폭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여성을 질시하거나 혐오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겨서도 안된다. 일단 자기 주머니가 든든해야 남을 도와도 돕는다. 내 배가 부르고 여유가 있어야 남의 입장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 과연 나와 동등하게 경쟁하려는 여성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는가.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기를 납득시키라는 것이다. 아니면 인정할 수 없다. 그렇지 못하다 여기기에 지금의 여성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동등해지려는 여성주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여성에게는 그럴 자격도 준비도 갖춰져 있지 않다.


다만 그럼에도 차이는 있다. 그럼에도 그런 여성들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인정하는가. 그마저 인정하지 않고 자기에 맞추려고만 하는가. 세상에는 그런 여성도 있고 여성주의자도 있다. 마찬가지로 나와 같은 인간도, 개인도, 시민도, 남성도 존재한다. 내가 싫다고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만한 여유조차 없다는 것이 지금 대부분 젊은 남성들의 현실이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당장 내가 급한데 남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미움으로 원망으로 이어져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자신부터 그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만다.


교육부터 바꿔야 한다. 그 점에서 일부 여성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 한다. 남성이 가장일 필요는 없다. 반드시 남성이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이유도 없다. 남성만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책임을 강요당해야 하는 이유는 더욱 없다. 굳이 피터지게 경쟁하지 않아도, 조금 남들보다 못하고 뒤쳐졌어도 그대로 좋은 남성을 사회가 허락해야 한다. 굳이 더이상 전처럼 치열하게 경쟁하지 않고도 지금의 자신에 만족하며 살 수 있도록. 물론 그 만큼을 여성이 나눠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많은 남성들이 지금의 여성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권리만이 아닌 책임과 의무까지 함께 나누어 지라.


아직까지 여성주의는 일부 남성의 기득권에 기대고 있는 바가 크다. 오히려 남성 자신이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기득권을 쥔 소수 남성들의 양해와 배려 속에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를 키워간다. 마치 애완동물 같다. 주인의 관용에 기대어 말썽을 부리는 고양이와 다르지 않다. 모욕처럼 들려도 어쩔 수 없다. 지금 여성주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새삼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여성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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