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니 몇 년 전 어느 연예인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기자가 지식인이던 시대가 있었다."


사실 그랬었다. 불과 수십년 전이다. 대학졸업은 커녕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대학까지 마치고 남들과 다른 높이에서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그들의 존재는 얼마나 대단하고 소중했었겠는가. 더구나 통신도 발달하지 못해서 개인의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던 시절 기자라는 이유로 세상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며 보통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소식까지 먼저 접할 수 있었다.


괜히 아이들 글쓰기와 논리력을 길러주겠다고 신문사설을 읽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많이 배우고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그것들을 글로 써서 대중에 전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그들에 대한 신뢰와 동경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기자라면 다르겠지. 기자니까 자신들과는 다르겠지.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그리고 실제 많은 기자들이 기자로서의 양심과 자존을 지키기 위해 심지어 목숨까지 내던지고 있었다. 권력의 집요한 탄압 속에서도 일신의 안위나 경제적인 풍요마저 포기한 채 오로지 진실과 정의만을 위해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있었다. 최소한 내 또래에서 아직까지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환상이 남아있는 것은 그런 시절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어지간하면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거의 가는 곳이 대학이 되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가 문제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로 더이상 의미를 가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그냥 몇 번 클릭만 하면 멀기만 하던 해외의 유수언론들마저 바로 찾아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아예 개인이 직접 뉴스를 생산해서 SNS등을 통해 공유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굳이 기자의 눈과 귀와 손을 빌지 않고서도 개인이 직접 정보를 찾아 읽고 이해하고 그것을 재생산하여 다른 개인들과 공유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기자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나마 기자로서 최소한의 양심과 자존마저 저버린 그냥 월급쟁이들이 지금의 현실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조금만 사정이 불리해지면 하는 말이 회사에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사에서 시키니 그렇게 한다. 데스크에서 시키니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 그러니까 대중이 기자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가장 첫째 이유는 그같은 개인의 사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자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직업윤리와 사명감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실을 위해 회사와 싸우고 데스크를 설득하는 의지와 용기다. 아니라면 기자들 자신이 말하는대로 그냥 월급쟁이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싫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평범한 개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굳이 그런 기자들에게 특별한 신뢰와 존경을 보내야 할 이유가 과연 있겠는가. 나도 역시 그냥 월급쟁이인데.


그냥 시대가 달라진 만큼 기자의 역할과 의미 역시 달라진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아닌 곳도 많다. 여전히 기자로서의 양심과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고 진실과 정의를 쫓는 기자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런 기자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런 기자들이 쓰는 기사에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부족함이나 비겁함을 가리는 방패로 써서는 안된다. 스스로가 알지 않은가. 자기는 그런 기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데도 여전히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중의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려 한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인하고 몰아가려 한다. 그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을 심지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스스로 기자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서 기자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신뢰만은 여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기자도 더이상 예전의 기자가 아니고 대중도 더이상 예전의 대중이 아닌데 여전히 예전과 같은 관계이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언론과 대중 사이에 보이는 심각한 균열과 괴리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봐도 좋다.


기자는 더이상 예전의 기자가 아니다. 대중도 더이상 예전의 대중이 아니다. 그렇다면 더이상 전과 달라진 현실에서 기자와 대중은 각각 어떤 식으로 새롭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야 하겠는가. 그러니까 아무나 하는 것이 기자라는 것이다.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 기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차피 고등교육까지 받은 다수의 대중 가운데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언론사에 입사도 할 수 있었기에 단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처럼 월급 받으며 사주와 편집부가 시키는대로 쓰라는 기사만 충실하게 생산해낸다. 직장인이다. 직업인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면 된다. 대중을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대중을 이끄는 것도 아니다. 회사로부터 받는 급여명세서를 위해 취재도 하고 기사도 쓰는 단지 직장인에 불과한 것이다. 딱 거기까지면 된다. 어디 감히 기자에게. 그래도 기자인데. 하지만 세상에 넘쳐나는 것이 그런 월급쟁이라는 것이다.


이미 많은 언론사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오로지 광고주를 위해서. 사주의 이익을 위해서. 정치권력과는 목숨걸고 싸울 수 있었던 언론이지만 자본권력 앞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먹고 살아야 하는 소시민이 되고 말았다. 언론이라는 브랜드가치를 지켜야 하는 소수의 유력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들이 그같은 자본의 논리에 굴복해서 그를 위한 기사를 단지 생산만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기에는 기자라는 직업 자체가 그를 위한 수단이자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치 남들과 다른 세상을 노니는 양 대중을 가르치고 이끌겠다는 오만이란 얼마나 근거없고 허황된 것인지. 그럴 자격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언론이란 기자란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인가.


사실 얼마전 중국에서 중국인 사설경호원에게 다른 사람도 아닌 대한민국 기자가 폭행당했을 때 같은 국민으로서 나 역시 분노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기자였으니까.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었으면 당연히 분노했다. 그냥 흔한 월급쟁이였다면 앞장서서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자라는 직업이 다른 월급쟁이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자들이 느끼는 억울함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었다. 그것이 특히 중국에서의 기자폭행 이후 대중과 언론 사이에 괴리가 극단적으로 드러나게 된 이유였던 것일 테고. 어느 언론에서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더이상 언론은 대중의 위에서가 아니라 대중의 아래에서 소비자인 그들을 섬기는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현실은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바뀌어 있는데 허튼 자존심으로 그 현실을 부정한 결과가 대중들에게 철저히 부정당하는 현실인 것이다.


단지 중국에서의 기자폭행은 계기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대중과 언론 사이의 서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그를 계기로 표면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대중이야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언론이 대중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마치 귀족이 사라진 시대 더이상 귀족을 공경하지 않게 된 대중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몰락한 귀족의 후손을 보는 느낌이랄까? 원래 기자란 이런 것이어야 하는데. 기자란 대중들에게 이런 존재여야 했을 텐데. 이런 대우를 받아야 했을 텐데. 하지만 기자라고 다 같은 기자는 아닌 것이다. 심지어 한겨레라고 같은 한겨레가 아니기도 한 것이다. 80년대 그 엄혹했던 시절을 고통속에 견뎌온 참언론인의 양심과 자긍심에 대한 신뢰와 존경이 지금의 한겨레를 있게 한 것이다. 단지 그 유산을 물려받았을 뿐 이순신의 후손이라고 그를 이순신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은 전제왕조시대에서나 통했을 사고방식이다.


솔직해지면 된다. 정직해지면 된다. 원래 기자의 일이 그런 것 아니었던가. 괜한 허세와 허위로 속이려 들지 말고 솔직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인정받으면 된다. 딱 거기까지면 기자라고 특별히 다른 직업보다 더 싫어하고 미워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기레기라 불릴 일도 없을 것이다. 기레기라는 말도 결국 기자에 대한 남다른 기대와 신뢰가 전제된 말이다. 돈을 받으니 쓴다. 돈을 주니까 쓴다. 대중이 돈을 지불하니 그를 위해 쓴다. 목적과 동기를 알면 행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서로 싸울 일도 사라진다.


안타까운 것이다. 주제를 모르고 분수를 모른다. 정작 기자라는 인간들이 달라진 현실에 대해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기자가 다 같은 기자가 아니다. 언론이 다 같은 언론이 아니다. 대중이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기자와 언론이 알려줬다. 자신들만 모르고 있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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