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우연히 동네건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일이 있었다. 돈이 없어 아는 동생과 술과 안주를 사서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데 벌써 한 잔 걸치고 온 동네건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비를 걸어 온 것이 계기였다. 시작은 시비였는데 다행스럽게도 그 동생이 소싯적에 꽤 놀았던 터라 잠시 족보를 따지더니 그대로 그쪽에서 오히려 술과 안주를 사서는 술판이 벌어졌었다. 바로 그때 그들이 나눈 대화의 요약이다.


"너 어디서 놀았냐?"

"노량진에 있었습니다."

"그래? 혹시 누구누구 알아?"

"누구로부터 말씀은 들었습니다."

"아, 걔? 그럼 누구는 알겠네?"

"혹시 이 형님 아세요?"

"지금 아마 인천에 있을 걸? 너 동생이구나."

"형님!"


아주 같지는 않은데 대충 비슷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 진보를 자처하는 몇몇 인사와 우연히 마주쳐서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혹시 누가 주장한 이런 이론 알아요?"

"언제 이런 논쟁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런 주장이 나왔죠."

"그렇기 때문에 김규항의 주장은 아주 낡은 이론이야."

"그쪽은 우리와 완전히 다르지."

"이쪽은 여기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나중에 꽤 유명한 진보논객 하나가 자기와 논쟁하던 네티즌에 대해 학력을 꼬투리잡아 공격했을 때 그래서 크게 납득할 수 있었다. 당시 이영훈이 한창 논란이 되었을 때도 서울대라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던 다수의 진보인사들을 보면서 과연 이것이 진보의 본모습이로구나. 그러니까 지금 진보언론과 관련해서 마치 진영을 나누듯 독자와 대립하는 기자와 지식인, 논객들의 모습이란 그 연장인 셈이다.


건달들 사회에서 계보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외부와 단절된 폐쇄적인 구조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보편사회의 법과 도덕, 규범은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암묵적 규율만이 그들의 행동을 정의한다. 마찬가지다. 자신들 사이에 오가는 논의가 보편적인 인식과 상식 위에 있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부인에 대한 호칭으로 '영부인'이나 '여사'를 관성적으로 사용해도 자기들만은 그런 호칭부터 동의하지 않겠다. 오히려 세상이 자신들을 쫓아 호칭을 바꿔야만 한다. 대중이 아직 의식화되지 못했기에 자신들이 대중을 이끌고 가르쳐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엇으로? 그래서 자기들 안에서는 그같은 주장과 논리들이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다. 사소한 차이로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지 못하고 배척하기 일쑤인 모습도 보인다.


이전까지 그래도 막연한 호감으로 진보정당과 정치인들에 표를 주어 오던 내가 아예 그쪽에 대해서는 관심을 끊게 된 계기였다. 여전히 민주당에 표를 줄 수 없으니 던지듯 진보정당에 주기는 해도 그 안에서 누가 무엇을 하든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그리고 지금 정의당 역시 비슷한 문제를 표면에 드러내고 있다. 언론은 아닐까? 자기들끼리의 계보를 위해서 기꺼이 독자인 대중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 독자를 오히려 갈라치기 하려는 것도 그들의 오랜 관습으로 인한 것이다.


하여튼 신기했다. 참고로 노빠들 가운데서도 특히 86들이 모이면 이런 족보질을 즐겨하고는 했었다. 그것은 당시 운동권의 문화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역시 인터넷이란 자체가 익명성의 공간이기에 족보질하려 해도 실명을 드러내야 하는 오프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자신의 족보를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은 그리고 결국 다른 길로 새나가기도 했고 말이다. 진보언론 등에서 문빠들 각성하라 할 때 비웃는 이유이기도 하다. 익명의 공간에서 족보든 계보든 뭐든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냥 개인이다. 이름조차 없는 그저 다수의 개인들.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까.


어차피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찾아오는 사람들도 관심없고 나 역시 굳이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공유하는가 하는 것일 테니까. 조직이 아니라 연대다. 계보가 아닌 연결이다. 과거도 미래도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무엇을 간절하게 공유하고 있는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항상 그모양 그 꼴일 것이다. 하긴 벌써 오래전부터 별로 기대는 없었지만. 그런 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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