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참여정부 초기 이른바 노빠들과 집요하게 싸워대던 진중권이 당시 민주노동당 지지자들을 향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개인이 스스로 조직화하여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를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고 있다. 그에 비하면 훨씬 더 선진적인 정당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부하는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빠를 닮아야 한다."


아마 전에도 썼을 텐데, 친노, 혹은 친노패권의 핵심은 극성맞을 정도로 집요하고 적극적인 그 지지자들에게 있었다. 적당이 이름 좀 있는 인사들끼리 모여 서로 주고받는 거래와 타협을 통해 대부분 중요한 정치적인 결정을 했었다. 다른 정치인이나 국민들은 그같은 몇몇 유력정치인의 결정에 일방적으로 따라야만 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3김으로 일컬어지던 구시대의 보스정치인들이었다. 그래서 3김이 모두 물러나고 나면 자신들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었는데 난데없는 존재가 그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바로 노빠로 정의되던 노무현의 열성지지자들이었다.


원래 2002년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주류가 후보로 밀었던 것은 이전 15대 대선에서 필마단기로 무려 19.2%, 490만표를 얻었던 최고위원 이인제였었다. 사실 그것을 노리고 이인제도 굳이 새천년민주당의 합당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기도 했었다. 새천년민주당 입장에서도 김대중 이후 유력한 대선주자가 없었고 이인제 또한 15대 대선에서 신생정당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기에 이해가 맞아떨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사실상 2002년 후보경선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인제는 새천년민주당의 유력대선후보로써 이회창과 양강구도를 이루고 있기도 했었다. 어찌되었든 다음 대통령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보편적인 에상과 전망을 한 번에 뒤집은 것이 바로 노사모라고 하는 조직화된 시민들이었다.


그때부터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내 편일 때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정동영이 천정배, 신기남 등 소장파들과 함께 민주당의 개혁에 실패하고 뛰쳐나가 열린우리당을 만들 때 그를 지지하며 뒷받침해 준 것이 바로 이들 대통령 노무현의 열성지지자들이었었다. 민주당 주류의 강고한 조직과 기반에 맞서 이들 노빠들이 노무현의 개혁을 도울 소장파들을 지원했었고 열린우리당의 창당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열린우리당을 만들고 대통령탄핵이라는 이슈에 편승하여 과반의석을 차지할 것이 예상되면서부터였다. 그러면 원내 과반을 넘어 차지한 거대여당을 누가 장악하고 움직일 것인가?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장애가 되고 위협이 되겠는가.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안에서 간신이라 불리고 싸가지없다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온갖 수모와 굴욕을 당해야 했던 이유였다. 유시민이 개혁신당을 만들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하며 했던 약속이 그것이었다. 당원이 주인되는 정당을 만들겠다. 정확히 열린우리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정동영이 보인 행보와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문재인의 혁신안이 관철되기까지 유시민이 저 정당은 그런 게 가능한 정당이 아니라며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거나 정동영이 당권을 잡으면서 당원들이 열린우리당의 당정에 관여하는 것만큼은 일단 막을 수 있었다. 그나마 열린우리당을 뛰쳐나가 새천년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 때는 아예 그런 것을 고려조차 않고 있었다. 2007년의 대통령후보경선에서는 아예 대놓고 버스떼기며 박스떼기며 온갖 구태스런 부정은 다 저지르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던 것은 정작 그같은 부정들에 분노하고 표로써 응징해야 할 당원과 지지자, 유권자의 참여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당원이지 대부분이 소속정치인에 의해 관리되는 개인의 조직들인 경우가 많았다. 정치인들끼리 서로 합의하고 납득하면 그밖에 대중의 반발과 분노는 얼마든지 무시되어도 좋았다. 물론 그 결과가 정작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통령후보에게 표를 주어야 할 유권자들의 이탈로 인한 역사적인 패배였다. 대통령선거사상 가장 적은 득표로 낙선한 2위의 명예가 정동영에게 돌아갔다. 경선을 통해 경선후보 정동영을 심판할 수 없었기에 아예 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 정동영을 심판한 것이었다. 아무리 이명박이 싫어도 정동영 같은 인간에 표를 주지는 못하겠다. 단지 인정하는 것이 늦었을 뿐 이제 정치의 주체이자 중심은 몇몇 유력정치인이 아닌 국민들 자신에게로 넘어오고 있었다.


어쩌면 손학규의 오판이기도 했다. 아니 그나마 당시 통합민주당에서 대중적인 지지가 높았던 인물이 손학규였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도전해볼만한 승부수이기는 했었다. 유시민이라는 유력한 인물이 빠진 나머지 혁신과 통합이라면 어쩌면 손학규 자신의 개인기로 그 지지를 흡수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70%의 당원과 시민이 참여한 경선에서 새로운 통합민주당의 지도부로 선출된 것은 친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참여정부의 한명숙 전 국무총리였었다. 2012년 대통령후보경선에서도 겨우 19대 총선에 출마해서 초선으로 당선되었을 뿐인 참여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 문재인이 손학규를 누르고 후보로 선출되고 있기도 했었다. 여전히 통합민주당의 자금과 인력, 조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기존의 주류들이었을텐데 경선만 했다 하면 매번 친노의 지지를 받는 후보에게 연패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래서 패권주의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더이상 유력정치인들기리 서로 눈치보고 주고받으면서 거래와 타협을 통해 나눠먹는 정치가 아닌 당원과 지지자의 전폭적인 지지에 의해 특정 계파가 독식하는 낯선 현실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온 탓이었다. 이대로라면 친노 이외에 자신들이 설 자리는 사라지고 만다. 정확히 문재인이나 그 측근이 아닌 어떤 경우에도 민주적인 경선을 치르면 그들을 승자로 만들어 줄 지지자들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있는 한 자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언론이 굳이 지난 대선국면에서 '문빠'라는 표현을 공식화하며 그들 지지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 전까지는 정치에서 언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이 있었다. 역시나 적당히 정치권과 주고받으면서 언론 또한 정치와 사회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를 바탕으로 아예 정계에 친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었다. 언론이 보도하니 사실이다. 언론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보도했으니 진실일 것이다. 그런 언론의 보도를 전적으로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다수의 유권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자신들이 언론의 역할까지 대신하겠다며 정작 거구로 자신들을 감시하고 견제하고 심판하려는 유권자들까지 잇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되찾으려 한다. 스트레스다. 어지간한 정치인들마저 두려워하며 눈치를 봐야 하는 언론에 대해 오히려 저들은 언론인 자신들이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여야 한다 주장한다. 매 순간 감시하고 비판하며 견제하려 한다. 매일 때리던 사람이 갑자기 맞기 시작하면 조절이 안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패러다임의 변화다. 과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부르주아가 한창 주류로써 성장하고 있을 때도 전통적인 귀족사회에서는 근본없는 그들의 천박하고 교양없는 태도를 걱정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아담 스미스 역시 자신의 저서 '국부론'에서 이들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고 있었다. 새로운 신분 새로운 계층이 나타난다는 것은 항상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그들을 어떻게 기존의 사회로 받아들일까 고민하고 갈등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친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뒤늦게 막을 수 없는 대세라는 것을 알게 된 이들 적극적인 유권자들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예우해야만 하는가. 그런데 아예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멱살을 잡은 채 흔들고만 있으니 당황할 수박에 없다. 내 영역을 빼았겼고 내 존엄마저 위협받고 있다. 오히려 비슷한 성향의 진영에 속해 있었기에 문빠들의 공격이 진보언론들에게로 향하면 보수언론은 진보언론을 방패막이 삼는다. 이렇게 과격하고 위험한 집단이므로 모두가 배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싸움의 시작이다. 아주 오래전에도 새로운 인류종이 출현하게 되면 기존의 종들과 경쟁하여 그 자리를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경쟁에서 지고 도태되어 사라지거나, 아니면 경쟁에서 이겨 도태시키고 혼자 살아남거나. 이제 그들이 주인이 된다. 그들이 주류가 된다. 아직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현실이다. 과도기에 서 있다.


사방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문빠를 정의하고 공격을 집중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문빠의 과격함은 적극성이다. 문빠의 집요함은 조직력이다. 누군가 일률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조직이 아니다. 스스로 세포가 되어 자연스럽게 이어진 무작위의 연대다. 원래 민주주의 국가에서 시민이 곧 주권자이며 주인이어야 한다. 개인이 스스로 조직화하여 주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일방적으로 받고 받아먹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다. 원래 자신들의 것이었을 권위와 권력을 되찾아간다. 이대로 달란다고 순순히 내줄 수만은 없다. 생존을 위한 싸움인 것이다. 문빠가 남는가? 아니면 자신들이 남는가? 문빠가 승리하면 자신들이 설 자리가 없다. 벌써부터 안전한 곳에서 비판만 하면 되었는데 거꾸로 일일이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 그 거북하고 어색한 느낌이 그들을 예민하게 만들고 공격적으로 만든다. 정확히 공포다. 미지에 대한 불안이다. 그들의 미래다. 필사적으로 흐르는 강물을 막으려 몸까지 던져본다. 나름대로 그들 역시 절박하다. 비장하기조차 하다. 계산이 안되는 이유다. 이성의 영역을 넘어섰다.


지난 선거들에서 한경오 등 진보언론들이 집요하게 혁신된 민주당과 문재인을 공격한 이유도 어쩌면 바로 이런 것들과 관게된 것인지 모른다. 혁신된 민주당이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는다.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날수록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고 역할과 영역까지 축소시킨다. 그러므로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다시 저들이 세력을 얻게 될 것이다. 저들에게 힘이 실리게 될 것이다. 생존의 문제다. 존재의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의 변곡점이다. 과연 문빠들은 이 변혁과 교체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들이 내세운 후보가 다시 한 번 대통령이 되었다. 전보다 더 집요하고 철저하게 준비한 상태로. 이대로 저들이 원하는대로 순순히 내어주지는 않겠다. 다짐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 앞에 바로 언론과 정치가 있다. 늦었지만 이제 싸움의 시작이다.


원래 당연한 것이다. 자신이 주권자니까. 내 정치니까. 내 정당이고 내 정치인이니까. 내 언론이니까. 내 진실이니까. 내 사실이니까. 그래서 각각이 독립된 단위이고 자발적으로 조직된 거대한 군체는 그를 위한 연대가 된다. 공동의 목적이 그들을 하나로 단합하게 만든다. 자신들의 힘으로 더 큰 역할을 하고 더 큰 책임을 지겠다. 자신들이 이 사회의 주인이며 당연한 권리다. 과도기다. 공짜는 어디에도 없다. 싸움이 흥미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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