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체면은 남이 알아주는 것이고 명예는 자기가 아는 것이다. 그래서 명예는 양심과도 이어진다. 얼마나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자신있게 나설 수 있는가. 당당히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가. 굳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가 떳떳하고 언젠가 알아주는 이가 있을 것을 안다면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다.


세조가 그토록 사육신에게 혹형을 가하고, 그 시신마저 갈갈이 찢어 전국에 조리돌림했어도 누구도 그들의 죽음을 부끄럽다 여기지 않는다. 가문이 풍비박산나고 남은 가족들마저 노비신세로 전락했어도 누구도 그들을 비웃거나 업수이 여기지 못한다. 반드시 처벌받는다고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권력에 직언을 하다가 유배를 가면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고는 했었다. 그러다가 잘못되어서 목숨을 잃더라도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당당할 수 있음을 믿었다. 남은 가족도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죄를 지었으니 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할지라도 명예가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감히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저질렀다. 온갖 파렴치한고 흉물스러운 범죄들에 연루되어 국민을 분노케 했다. 어떤 비난과 조롱을 듣더라도 오히려 부족할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책임은 다했다고 하는 사실은 남는다. 더이상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책임질 수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 국정의 공백과 혼란, 무엇보다 그로 인한 국가적인 손실과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나 책임있는 이들에게 뒷일을 맡긴다. 대한민국의 법과 정의와 질서를 수호할 책임이 있는 국가원수로써 법적인 수사와 처벌도 겸허히 받아들인다. 잘못은 했어도 그 처리에 있어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은 했다. 


바로 그것이 명예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죄도 지었고 처벌도 받았지만 대통령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은 지켰다. 그러므로 국가와 국민 역시 전직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예우는 지켜준다. 범죄자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물러난 사람으로써 예우를 지켜 조사든 처벌이든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을 명예라 여기면 명예일 것이고, 치욕이라 여긴다면 거기까지인 것이다. 양심이 어디에 있는가다. 안타깝게도 그런 명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이해한 문재인의 최소한의 명예는 지켜주겠다는 말의 뜻이다. 문재인도 감옥에 갔다 온 적이 있었다. 법에 의해 처벌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문재인에게 명예가 사라졌는가. 법이 죄인이라 결정했다고 문재인에게 명예는 없는 것인가. 최소한의 예우조차 없이 전직대통령을 조리돌림하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 검찰조사를 받기 위해 출두했음에도 마치 승자인 양 출두한 전직대통령을 비웃으며 경멸과 조롱을 쏟아냈다. 자신들이 싸워이긴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먼저 양보한 것이다. 그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준다. 그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사람이다.


오히려 무섭다. 마냥 끌어내리자 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순간의 분노와 증오에 영합하는 것이다. 그 순간에도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잊지 않는다. 분노하고 비판하면서도 항상 스스로를 절제하며 선을 지킨다. 그런 만큼 온정에 기대어 타협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동안 보아온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품격이다. 자상하지만 엄격하다. 관대하지만 단호하다. 지난 민주당의 내분도 그렇게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결국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것도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마지막까지 다했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그나마 마지막 책임을 다한다면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지켜주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법을 찾은 수밖에 없다. 맹자의 말을 다시 인용한다. 왕이 왕답지 못하면 더이상 왕이 아닌 일개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데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지켜줄 필요가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이 스스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한다면 명예를 지켜주겠다는 어쩌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최후통첩과 같다. 만일 지금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나마의 예우도 없다.


과연 대통령에게 지켜야 할 명예가 있는가. 지키고 싶은 명예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그저 남들 눈에 보이는 체면만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문재인의 발언을 비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감옥에 갇혔다고 명예가 없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단순한 사실이다. 때로 지나쳐서 우스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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