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몸무게 50킬로그램인 남성에게 몸무게 100킬로그램인 남성과 아무 조건 없이 링 위에서 정정당장하게 권투로 겨루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과연 5살짜리 여자아이와 20살 넘는 성인남성을 같은 조건 아래 아무 제약없이 시합하게 했을 때 그것을 공정하다 정당하다 말할 수 있는가. 아니 같은 성인이더라도 20살 여성과 20살 남성을 같은 조건에서 시합시키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맨몸으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프로격투기선수에 대항해서 여성이 손에 칼을 들었다면 그것을 부당하다 비겁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힘에서도 우월한 상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어야 했다면 그것만으로 악의가 있었다 처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가. 강자의 법과 약자의 법은 그래서 다르다. 강자는 가만히 있어도 이미 우월한 지위에 있기에 강자인 것이다. 약자는 비상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열등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만큼 강자에게는 엄격하게 약자에게는 관대하게 규준을 적용해야만 한다.

여성주의가 얼핏 과격하게 보이는가. 흑인운동이 때로 지나치게 폭력적인 것은 아닌가 여겨질 때가 있는가. 퀴어축제에서 여러 성소수자들은 일반인의 상식을 벗어난 모습을 자주 보이기도 한다. 약자이기 때문이다.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해야지만 겨우 완고한 강자들의 세계에 조금이라도 자기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더 강하게 더 극성으로 더 비상한 수단을 동원하여 발버둥쳐야지만 겨우 자기에게 허락된 권리를 조금이나마 누릴 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으라. 여성도 남성과 같이 행동하라. 점잖게. 얌전하게. 착하게. 성실하게. 온건하게. 하지만 막상 남성이 자신을 위협하려 하면 아무거라도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손에 들어야 하는 것이 여성인 것이다. 무기를 들고서도 감히 상대인 건강한 남성을 이기기는 커녕 막을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한다. 허세를 부리고 소리를 지른다. 거짓으로 협박도 한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같은 룰 아래 승부를 겨룰 한가한 상황이 아닌 것이다. 어째서 여성들이 저토록 강하게 남성들을 성토하는가. 정확히는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신체적인 남성의 우월함이다. 그럼에도 여성을 단지 성적 대상으로, 욕망의 분출구로 삼으려는 공격성이다. 남성이 자제해달라. 남성이 조심해달라. 조용히 말해서는 들어먹지 않으니까. 언제 한 번 남성들이 조용한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적 있는가.

평소 무시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쳐 왔었다. 이제 보니 왕왕 시끄럽다. 괜히 귀아프고 정신이 사납기도 하다. 내가 손해를 본다. 내가 피해를 본다. 내가 기분나쁘다. 여성을 철저히 타자화한다. 객관화한다. 잣대를 들이민다. 평가를 하고 채점을 한다.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기준으로. 여성은 공격적이다. 여성의 반응이 지나치다. 단지 내 관점에 의해서. 다른 것 없다. 내가 귀찮고 싫다. 아무튼.

혐오란 대상을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대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부정하는 것이다.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모든 가능성을 부정한다. 말과 행동을 오로지 자기에게 귀속시킨다. 자기가 판단한다. 자기가 결정한다. 종속된다. 여성들이 시끄럽다. 여성들이 지나치다. 여성들이 잘못알고 있다. 잘못 판단하고 있다. 어리석다. 한심하다. 나는 잘못 없다. 재미있다.


안타깝게도 모든 인간은 선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깡패들조차 무고한 사람을 때리고 협박하면서도 다 당하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는 한다. 성폭행을 저지르고 오히려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믿는 것이다. 아마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 남아있던 것들 중에는 희망과 함께 양심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흔히 생각한다. 혐오란 단지 싫어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무작정 싫어하는 것이라고. 물론 그런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싫어할 때 항상 단서를 단다. 이른바 '착한 타인론'이다. 전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거스르려 하지 않는 착한 누군가다. 착한 흑인, 착한 유대인, 착한 동성애자, 그리고 착한 여성... 내가 바라고 내가 기대하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존재한다면 마땅히 나는 여성들을 지지할 것이다.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성실하고 바르고 온건한 모습만을 보여준다면 나 역시 동성애자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전혀 타인이며 스스로 독립된 주체인 그들 자신이 어째서 자기가 생각하는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금기다. 지금 이 선을 넘어서면 나는 당신들을 지지하지 않겠다. 당신들을 비판하겠다. 당신들을 공격하겠다. 그러니 이 선을 넘지 말라. 상대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선이다. 나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당신들은 이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보호구역이다. 역차별론의 실체이기도 하다. 이만큼 자신들은 그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준다. 그런데 정작 정부가 정한 보호구역 안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그런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존엄이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인정되는 것이다. 그것을 타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평가한다. 그냥 울타리다. 이 밖으로 나오지 말라.


저들이 하는 말들이 결코 여성에 대한 혐오일 수 없는 이유다. 이미 자신들은 여성들에 대해 기준을 제시했다. 자신들이 지지하고 동의해 줄 수 있는 한계를 정해주었다. 여성을 비판하는 것은 자신들이 제시한 그 선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여성의 잘못이며 여성 자신의 책임이다.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해서 비판하는 것이지 단지 여성이 싫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에 여성에 대한 혐오는 없다.


주체가 아니다. 독립된 존엄한 존재가 아니다. 대상이다. 객체다.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강제할 수 있는 타자다. 그리고 그런 자체가 바로 혐오이고 차별이다. 흑인을 차별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도 같은 소리를 한다. 올바른 흑인은 인정한다. 사회적으로 성실하고 정직한 삶을 사는 흑인들은 충분히 동등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존중한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흑인들을 싫어한다. 흑인들을 혐오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있고 이유가 있다. 깡그리 무시한다. 오로지 자기 안에 존재하는 자기가 이미지화한 흑인만이 바른 흑인이다.


여성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인다면 저마다 나름의 원인과 이유가 있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도 보이는 것이다. 모두는 자기의 경험과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긴다. 내면화 한다. 주체로써 인정하고 스스로 그에게 다가가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한다. 모두가 각자 자기의 이유와 자기의 동기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에 옮기는 주체여야 한다. 인정하지 않는다. 바른 여성은, 바른 인간은 오로지 자신이 만든 이상적인 이미지 안에 있다.


무엇이 혐오인가. 무엇이 차별인가. 어째서 남성들은 여러해전 '루저'라는 단어 하나에 그토록 분개하고 있었던 것인가. 키가 작다는 이유만으로 경멸당하고 무시당했다. 한 여성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남성의 개별적 차이가 무시되었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키 큰 사람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가치가 있다. 여성다운 여성만이 의미가 있다. 다르지 않다. 자신의 가치를 오로지 타인이 결정한다. 내가 타인을 일방적으로 정의한다.


나는 여성을 싫어하지 않으니까. 나는 여성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좋아하니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여성은 현실의 여성인가. 현실의 모순되고 부조리한 때로 납득되지 않는 입체의 여성인가. 영상에 여성은 없다. 사진이나 텍스트에도 여성은 없다. 그것들은 철저히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가공된 이미지일 뿐이다. 실제로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그들만이 여성이다. 무엇이 진정한 여성인가. 진심으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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