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하나의 사회에서 생산할 수 있는 부의 총량에는 한계가 있다. 부란 물질이다. 교환가능한 재화다. 새로운 물질을 무로부터 창조해내지 않는 한 현실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서 무언가를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여러해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도 교환가능한 화폐는 넘쳐나는데 정작 교환의 대상이 되는 가치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투자할 곳이 필요한데 투자할 곳이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전제한다. 바로 자본주의가 가지는 현실의 모순이다. 자본주의는 무한한 자본의 증식을 추구하는데, 정작 현실은 물리적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어 온 이유였다. 무한히 증식된 자본이 정작 교환할 대상을 찾지 못하며 스스로 가치를 잃게 된다. 여전히 10이라는 재화만을 생산하는데 자본만 100으로 늘어나면 자본의 가치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모순의 파괴력이 사회를 휩쓴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선택한 대안이 스스로 실물가치를 대신할 수 있는 절대가치로서의 화폐였다. 금이 가지는 지위를 대체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미국이라고 하는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신용으로 삼아 절대가치로서의 달러를 찍어낸다. 달러는 그 자체로 시장에서 독립적인 지위를 갖는다. 달러가 바로 자본의 기준이 된다. 현물가치의 뒷받침없이도 달러의 생산을 통해 전체의 가치는 무한히 증가할 수 있다. 자본 역시 무한히 증가한다. 물론 그렇게 무한히 증가한 자본의 대부분은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일반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을 하락시키지 않으면서도 자본의 이익 또한 증대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여전히 유지됙고 있는 수입을 보면서 노동자 역시 아직은 아무 문제 없다고 스스로 납득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것은 미국과 같은 압도적인 힘과 신용을 가직고 있는 특수한 경우에만 한정된다. 그러면 스스로 기축통화를 발행할 수 없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 아무리 화폐를 찍어내봐야 시장에서는 달러를 기준으로 그 가치가 평가된다. 지나치게 화폐를 찍어내면 화폐의 가치는 폭락하고 전체의 가치는 비숫한 수준으로 유지된다. 거꾸로 가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비용을 줄인다. 실제 필요한 비용의 지출을 줄임으로써 나머지 잉여가치의 절대량을 늘린다. 수입은 줄더라도 지출도 역시 준다면 삶의 수준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나마 비용을 아끼겠다고 중요한 안전관리마저 파견업체에 맡긴다. 2교대로 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인건비 아끼겠다고 훨씬 적은 수의 사람만을 고용해서 그들에게 넓은 범위를 모두 책임지게끔 한다. 비용이 줄어들면 아낀 나머지가 마치 자신의 수입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공공재인 지하철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물며 택배와 같이 직접 와닿는 분야라면. 고작 2500원에 소비자는 택배기사들을 부려 문앞까지 물건을 배송시킬 수 있다. 만일 택배기사들이 받는 수입이 지금보다 두 배 아니 그 이상 현실적인 수준으로 오른다면 어떻게 될까?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 반대한다.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을 노동자 자신이거나 가족이고 지인일 국민들이 먼저 나서서 반대한다. 내 지출이 는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늘어난다. 상대적으로 자신의 소득이 감소한다. 이미 노동자를 어떻게든 쥐어짜야지만 유지되는 사회인 것이다. 더 큰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 노동자는 서로 경쟁하며 비용을, 소비를 줄여야만 한다. 노동자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더 낮은 임금에도 버티며 사회를 지탱하는 도구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이번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가 가지는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규정보다 훨씬 못미치는 인력을 그것도 파견직으로 채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낀 인건비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국민 스스로가 그것을 자신의 이익으로 여긴다. 더 낮은 임금에, 더 열악한 조건에, 그럼으로써 수입의 증가 없이도 자신은 이전과 같은 - 어쩌면 그 이상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어째서 한국사회에서는 어떻게든 경제를 살리자면서 노동자의 임금과 지위, 처우에만 관심을 가지는가. 한국경제가 가지는 근본적 모순이다. 자본의 증식에는 한계가 있다. 전체의 이익을 늘리기 위해서는 결국 비용과 지출을 늘여야 한다. 그렇게 유지되어 왔다. 사람을 싸게 부리면서 아직은 자신은 괜찮다. 문제없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었다. 한 해 재해로 인정된 사망만 무려 995건에 이른다.

부디 명복을. 죽고 나서도 보상조차 거의 없다. 그저 개인적으로 안타까워 할 뿐 부당한 현실을 바꾸려는 어떤 시도도 노력도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결국은 다시 저비용의 구조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이어질 것이다. 서로의 살을 베어먹고 피를 마시며 어떻게든 악착같이 버틴다. 그래서 도태되면 따라오지 못한 자를 비난한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누구를 위한 명복일지.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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