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처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법의 내용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패스트트랙도 핵심은 아니었다. 자유한국당이 국회선진화법을 어겼는가의 여부도 크게 의미가 있지 않았다. 결국은 누가 이겼는가. 과연 누가 자신들이 의도한 목표를 이루어냈는가. 혹은 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는가.

 

리더십이란 결국 힘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며 믿음이다. 그동안 보수정당이 민주정당에 비해 한참 높은 국민적 지지를 받아온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동안 집권정당으로서 국정을 책임져 온 실적과 경험이 있었다. 오랜세월 이 나라를 지배하면서 확보한 인적, 물적 자원 역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장 자기소개에 써넣을만한 그럴싸한 경력들은 집권세력인 그들과 관계있는 것들일 터였다. 아무래도 어디서 뭐하다 온 지도 모를 사람보다야 그냥 봐도 알 만한 스펙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믿음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인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국정을 맡기자면 민주정당보다야 해 본 놈들인 보수정당이 더 나을 것이다. 그것은 김대중과 노무현 두 대통령의 집권기에도 대부분 국민들 사이에 확신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냥 노무현 한 사람 잘못해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죽하면 보수정당에 반대하던 유권자들마저 도저히 그 지리멸렬한 꼴을 못봐주겠다며 민주정당에게서 등돌리고 있었다. 선거 때만 되면 어쩔 수 없이 보수정당을 막기 위해 표를 주는데 그렇다고 평소 지지자라 말하기 창피하기만 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민주당의 이미지였다. 보수정당의 유일한 대항마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태산같은 힘으로 좁쌀만하게 행동한다는 말 그대로 거대양당의 한 축으로써 보수정당의 독주를 견제하는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무능하다. 그렇지 않아도 보수정당이 인물은 더 낫다는 믿음이 있는데 반대편에서 그나마 무능하다는 인상만 더하고 있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기들끼리 싸움만 한다. 어차피 자신들도 이길 것이란 확신이 없으니 살 길 찾겠다고 자기 정치만 열심히 한 결과였다. 이런 놈들을 과연 보수정당에 대한 대항마라는 이유로 지지해야 하는가. 

 

원래 프로스포츠에서도 성적이 좋아야 팬들이 모이는 것이다. 아무리 고향팀이고 평소 응원하고 있었어도 성적이 계속해서 좋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멀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과 이념과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정당이라 할지라도 이길 것이란 확신이 없으면 선뜻 지지하기가 꺼려지는 것이다. 정의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목숨을 거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도 많고 정의당의 정책에 동의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그러나 결국 선거에서 이길 것이란 확신이 없으니 이길 것같은 민주당으로 표가 몰리고는 한다. 민주당으로만 표가 몰리니 오히려 정의당보다도 더 왼쪽에 있는 진보적인 인사들마저 정의당을 거르고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기도 한다. 비슷한 맥락이다. 민주당의 이념이나 정책의 지향이 같아도 민주당으로는 당선될 것 같지 않다. 민주당을 지지해봐야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될 것 같지 않다. 더 나아가 그런 민주당이 정권을 잡는다고 뭔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그 당 돌아가는 꼬라지 보고 국정을 맡겨보고 싶어지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번 패스트트랙 지정을 둘러싼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두 거대정당의 싸움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패스트트랙에 지정되어봐야 짧으면 180일이고 길어지면 무려 330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은 과정들을 거쳐야 한다. 그러고서도 본회의에서 부결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차라리 패스트트랙을 내버려두고 여론전을 펼치면서 본회의에서 부결시키는 것도 좋은 전략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최장 330일 이후 본회의에서 처리하게 되면 총선 바로 직전에 대통령의 중요한 공약을 부결시키는 상당히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 패스트트랙이 마치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패스트트랙에 지정만 되면 그대로 법안이 확정되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패스트트랙 지정단계에서 대통령의 핵심공약을 자신들의 모든 실력을 동원해 반드시 막아내고야 말겠다. 독재타도라는 말까지 나왔다. 헌법수호라는 말까지 외치고 있었다. 국회점거에, 물리력사용에, 장외투쟁까지. 과연 이후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싸운다면 이보다 더 강력한 수단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공세의 수위를 높일 때 다른 어떤 수단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 한 번의 싸움에서 패스트트랙 지정을 좌절시키면 정부와 여당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한 편 자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될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언론과 바른미래당 내부의 옛새누리당계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다. 배수진을 치고 승리를 거두면 이후 정국은 자기들 마음대로 된다.

 

하지만 언론의 지원에도 민주당은 냉정했다. 자기 고집만 앞세우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과거 민주당과 달랐다. 바른미래당에서 새로 내놓은 공수처법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음에도 일단 공수처법을 통과시키고 보자는 한 가지 목표가 서자 두 말 없이 하나가 되어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자유한국당이 혼자서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동안 민주당은 집권여당으로서 다른 세 야당을 설득하며 그들의 주장과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혼자가 아닌 나머지 4개 정당 모두와 함께하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민주당이 크게 양보함으로써 패스트트랙은 예정되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어찌되었든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100을 만족하지 못해도 다만 자신들이 목표한 최소한만 이룰 수 있다면 기꺼이 누구와도 함께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겼다. 혼자가 아니었기에. 독불장군이 아니었기에. 무엇보다 모든 것을 걸지 않았다. 최소한만 걸었다. 공수처법이든 선거법이든 검경수사권조정이든 일단 패스트트랙에 지정하는 최소한만을 걸고자 했었다. 집권여당으로서의 책임감이다. 그리고 그런 여유가 두 당의 승패를 갈랐다. 바른미래당의 새로운 공수처법까지 받아들이면서 패스트트랙 지정은 성공했고 자유한국당은 극한의 투쟁 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하다. 민주당은 자신들이 의도한 바를 이루었다. 자신들이 목표한 바를 이루어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처음 자신들이 의도하고 목표했던 바를 관철해 낼 수 있었다. 반면 자유한국당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피고발자만 양산하고 말았다. 언론이 애써 감추고 있어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자신들이 만든 국회선진화법을 어기며 많은 국회의원과 보좌관들이 전과자가 될 지 모르는 처지로 내몰리고 말았다. 그러고서도 애초 목표한 패스트트랙 지정 저지를 이루어내지 못했으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과연 앞으로 다시 국회를 점거하고 물리력을 사용하고 장외투쟁을 하려 할 때 이미 한 번 실패했는데 충분한 동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자유한국당은 모든 것을 걸고서도 싸움에서 졌고 민주당은 언론에서만 그렇게 몰아갔을 뿐 그리 많은 것을 걸지 않은 상태에서도 여유롭게 승리할 수 있었다. 두 정당의 역량이 그대로 드러난다. 두 정당의 현재 가진 바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과연 누가 수권정당으로서 국정을 책임지기에 걸맞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가. 누구에게 그만한 힘이 있는가.

 

솔직히 불안했었다. 바른미래당의 공수처법안은 민주당의 그것과 너무 거리가 멀었다. 타협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설마 이번에도 자기들의 애초 의도의 순수성을 지키겠다고 알아서 스스로 판을 깨는 모습을 보일 것인가. 그럴 경우 원인제공이야 누가 했든 결국 패스트트랙 지정이 좌절되었으니 자유한국당이 승자가 될 것이고 패스트트랙지정에 실패한 민주당은 패자가 될 것이다. 집권여당으로서 야 3당을 설득해서 함께 추진했던 패스트트랙이 어찌되었든 좌절된 이상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자칫 이후 정국에서 주도권을 크게 상실할 수 있다. 확실히 달라졌다. 그럼에도 당내 이견들을 단기간에 수습하며 다시 한 번 하나의 단일한 주장과 행동으로 애초의 목표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해찬을 잠시나마 의심했던 것을 반성한다. 이번 패스트트랙 지정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대표 이해찬과 원내대표 홍영표였다. 적절한 때 적절한 판단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자유한국당의 입지를 좁히고 민주당에게는 여지를 넓혀주고 있었다. 모든 언론이 적인 상황에서 오로지 지도부의 판단과 행동으로 자유한국당은 스스로 파놓은 배수진이라는 함정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자신들이 선택한 전장에서 자신들이 키운 명분에 의해 그 패배는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정부와 여당의 의도를 막지 못한 채 자신들의 무력함만 드러내게 되었다.

 

과연 이번의 결과가 앞으로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중요한 것은 기울어진 언론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정들은 대부분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로 강경하게 저지하고 나섰으면서 끝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민주당이 원하는대로 법안들이 패스트트랙에 지정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국회선진화법을 어겼다고 고발당한 국회의원만 수십인데 정작 그렇게까지 하고서도 아무것도 막지 못했고 지키지 못했다. 그런 자유한국당에 거꾸로 국정을 맡겨도 좋을 것인가. 의회권력을 쥐어주어도 좋을 것인가. 부패나 이념의 차이보다 유권자에게 어쩌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능력의 유무인 것이다. 그럴만한 실력과 자격이 되는가. 그런데 그 무능함만 유권자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이길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을 더 크게 얻었다.

 

정의당도 얻은 것이 있다. 민주평화당도 얻은 것이 있다. 바른미래당은 정확히 반반이다. 그럼에도 결국 서로가 각자 자기 갈 길을 찾았다는 점에서 아주 나쁘지는 않다. 서로가 목표하는 바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그러면 있을 곳도 서로 달라야 한다. 그에 비하면 자유한국당이 이번의 싸움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지지율은 올랐지만 과연 그 지지율이 자유한국당의 미래까지 담보할 수 있을 것인가. 총선이 바로 1년 뒤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아무튼 민주당을 다시 보게 되었다. 민주당도 하면 된다. 지도부도 훌륭했고 이탈자 없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던 민주당의 단합 또한 보기 좋았다. 되는 집안은 뭘 해도 된다. 지금 모습만 내년 총선까지, 아니 다음 대선까지 계속 이어갈 수 있으면. 스스로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그정도 힘은 있는 정당이다. 나 역시 새삼 깨닫는다.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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