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20대 남성들의 불관용과 일상화된 사회적 불관용

가난뱅이 2019. 11. 17. 18:52
그러고보면 한국 사회에서 존중이니 배려니 하는 것은 그야말로 남의 이야기다. 거리가 멀면 멀어서,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워서, 거리가 머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 거리가 가까우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조금 막 대해도 된다. 갑질이란 게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게 아니란 것이다. 단지 자기보다 어리고, 자기보다 직급이 낮고, 혹은 자기 자식이고 학생으로 자기 지배 아래 있기에 더욱 생각해주는 마음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문득 보니 어떤 사람들에게는 잘 대해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엄밀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보호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와는 전혀 거리가 멀지만 어차피 남의 일이니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어찌되었거나 나는 받지 못하는 보호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위로부터 받고 있다. 나에게는 이렇게 말도 행동도 함부로 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조심하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니 여성만이 아니다. 성소수자가 뭐라고. 난민이 뭐라고. 지방에 살고 집이 가난하면 그게 또 무슨 대수라고. 어차피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누군가로부터 존중받거나 배려받을, 사회와 주위로부터 보호받을 것이란 기대조차 없다. 그러니 모두 똑같아지자.

그러고보면 젠더이슈에 대해 젊은 남성들이 한결같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왜 내 말은 안 들어주는가. 왜 자신들이 하는 말은 진지하게 들어주려 하지 않는가. 굶주려 있는 것이다. 정확히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독립된 인격으로서 다른 누군가로부터 존중받고 배려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존엄한 인간으로서 모두로부터 인정받고 보호도 받는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하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오죽하면 하태경이나 이준석 같은 얼치기들에게도 환호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수준의 인간들인가 뻔히 알면서도 그나마라도 자신들을 이해하려 애써주고 대신해서 말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여성들은 어쩨서 저리 조심스럽게 위해주는 사람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여성들도 불만이 없지는 않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보호가 반드시 존중과 인정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여성들이 더 잘 안ㄴ다. 어차피 여성들도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배려받지 못하는 것은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체념에 익숙해져 있다. 여성이니까.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지만 아직은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두 주위의 눈치를 봐야 하고 더 자신의 감정이나 욕망을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착한 여자로 남을 수 있다. 반면 좋은 남자란 어찌되었거나 좋은 직장 잡아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있는 남자여야 한다. 여기서도 갈린다. 그러자면 남성들은 자신들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우위에 있는 여성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히려 여성은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백안시되지만 남성은 능력이 없다면 무시당하고 경멸받는다.

인터넷에서도 너무나 쉽게 흔하게 접하게 되는 인간에 대한 혐오와 경멸을 담은 표현들을 보면서. 쉽게 존중을 잃고 배려를 놓으며 인정을 접는다. 단지 모두는 대상이 되어 버린다. 인터넷만일까. 어째서 세상에는 그리 갑질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멀쩡하던 사람들이 그럴 기회만 주어지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드는 추악한 괴물의 모습을 보인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 단지 개인을 개인으로 보지 않으니. 여전히 인간이란 수단이고 도구일 뿐이다. 부모의 사랑조차 자식에게 조건을 걸고 단서를 단다. 자격이 없다면 인간으로 존재할 수도 없다.

알릴레오 이번 화를 지금에서야 겨우 봤다. 역시 유시민이 없으면 관심도가 떨어진다. 오히려 시사인이 진행했다는 설문과 통계를 통해 어느 정도 답을 찾아가는 듯하다. 물론 정답은 아니겠지만 가깝지 않을까.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 국가로부터 배려받지 못한다. 모두는 개인이다. 정글에 내던져진 알몸의 개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는 알몸이 되어야 한다. 공정이란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알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지난 수 십 년 간 주위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압축해서 성장해 온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랄까. 어느새 돌아보니 흉측간 회물이 거울 앞에 앉아 있다.

결국은 공동체의 재건이어야 하는 것이다. 어째서 여성들을 배려해야 하는가. 어째서 여성들을 위한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인정해주어야 하는가. 그 전에 여성들 역시 남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일 테니까. 82년생 김지영을 보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로 아예 남성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행동은 남성들의 적대감만 자극할 뿐이다. 여성만 입이 있는가. 여성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여성의 이야기만 들어주어야 하는가. 남성도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일 것이다. 여성들과 다른 자신의 이해를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득달같이 달려들어 뭇매를 가하는 모습에서 여성들도 이미 괴물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남성을 단지 적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남성이 여성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할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보다 우리 사회의 근본에 닿아 있는 문제인 것이다. 지난 수 십 년 간 우리들 자신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간과해 왔던 것들이 어느새 성숙해 버린 자아와 함께 폭발하듯 터져나온 결과인 것이다. 더이상 이대로는 못살겠다. 그러나 바뀔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모두가 같아지자. 내가 존중받지 못하니 존중하지 못하겠다. 배려받지 못하니 배려하지 못하겠다. 보호받지 못하니 보호하지 못하겠다. 누구의 무엇의 잘못인가. 원인에 답이 있다. 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을 것이다. 무거워지는 이유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먼 길을 지나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처럼. 결국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는 하다.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