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류와 혐일류, 새삼 깨닫는 한국과 일본의 달라진 관계
아마 몇 년 전부터 일본의 라이트노벨 가운데 이세계물의 비중이 상당히 늘었을 것이다. 정확히 단순히 이세계로 넘어가는 이야기라면야 한 세기도 훨씬 전부터 있어왔지만 그런 정도를 넘어 아예 이세계로의 이동이 치트키인 것처럼 다른 세계에서 현실의 열등감이나 불만족들을 해소하는 이른바 깽판물이 늘었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이세계로 고등학생이 넘어가서 깽판을 친다는 뜻의 이고깽이란 꽤 오래전 유행한 단어였었다. 무려 2000년대 초반 허구헌날 별의 별 고등학생 놈들이 별의 별 이세계로 넘어가 온갖 것들을 다 해 본 바 있었다. 그러고보면 거의 10년 넘게 차이 날 것이다. 심지어 일본에서 이세계물보다 먼저 유행한 게임소설마저 한국이 더 빨랐었다.
사실 먼저 근대화도 이루고 선진국에도 진입했던 만큼 대부분 분야에서 일본이 우리보다 한참 앞서 가고 우리가 그 뒤를 바짝 붙어 쫓아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몇 가지 우리가 일본보다 오히려 몇 걸음 더 앞선 것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가 바로 일본 라이트노벨의 이세계물과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혐한물들일 것이다. 이세계깽판물이야 이미 2000년대 후반이면 유행이 아예 지나고 있었고, 혐한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혐일물들 역시 벌써 1990년대 초반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라는 것이다. 고작 동경특파원 전력이 전부인 전여옥이 무엇으로 기세등등하던 원내 1당의 공천을 받고 지금도 대표적인 보수논객으로 행세하고 다니겠는가. 바로 그가 쓴 한 권의 책 때문이다.
그 제목도 너무나 적나라한,
"일본은 없다."
워낙 크게 히트쳐서 군대에 있던 나마저 동생이 보내줘서 읽었을 정도였다. 일본인과 일본 사회는 이렇구나. 이렇게 문제가 많고 모순투성이구나. 그러니까 우리보다 딱히 일본이 더 나을 것도, 그만큼 더 대단할 것도, 그렇기 때문에 부러워하거나 두려워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의 성공을 본 다른 출판사에서도 다투어 비슷한 종류의 책을 내놓으며 아예 서점에는 그런 종류의 책들만 모아 놓은 코너까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 아닌가?
전에도 말했을 것이다.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일본을 증오하는 한 편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그래서 일본 정치인의 말 한 마디에도 온 나라가 들썩이고 했던 것이었다. 주로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거리에 몰려나와 규탄대회를 열고, 심지어 감정이 격해지면 손가락을 자르고 배를 가르는 사람들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참고로 이 손가락을 자르고 배를 가르는 것은 일본 야쿠자들로부터 전해진 것이었다. 마치 일본에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절박감에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만큼 아직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세대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기에 자칫 방심하면 언젠가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무의식이 트라우마처럼 한국사회에 깊숙이 잠재해 있었던 탓이었다. 덕분에 불과 얼마전까지 일본과 전쟁을 벌여 저들의 침략을 저지하는 이야기들이 상당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며 소비되고 있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지금 젊은 세대들이 굳이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도발에 일일이 흥분하며 반응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옳다 여겨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조차 이제는 과거다. 일본의 침략을 우려하는 것 역시 늙다리들의 철지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1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일본과 같은 세계에 속해 있다는 인식이 확고했고, 그보다는 더이상 일본이 우리에게 위협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굳이 '일본은 없다'같은 책을 열광하며 찾아 읽지 않아도 일본의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 들을 속속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정보화시대의 네트워크를 통해 알 수 있다. 좋은 점 잘하는 점은 배우고 안좋고 못하는 것들은 경계하여 멀리한다. 그렇다고 자기를 비판하면서 과거처럼 비굴하게 비루하게 자기를 낮추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국뽕도 싫지만 일뽕도 싫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진실이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일본해가 동해보다 더 타당성 있고 과거사 문제에서도 일본의 주장에 일부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하던 이들조차 일본에 등돌리고 그들의 불매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 이유인 것이다. 더이상 한국의 서점에서 일본을 폄하하는 혐일류와 같은 책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거꾸로 한국에서 혐일류 서적들이 사라져가던 시점에 일본에서 혐한류 서적들이 늘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이상 한국이 일본을 전처럼 민감하게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일본 입장이 한국이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이전까지 한국이란 단지 이웃해 있을 뿐인 굳이 의식할 필요 없는 변변치 못한 나라에 지나지 않았다면 언제부터인가 의식하고 신경쓰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로 자라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한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자신감이 넘칠 때는 그런 한국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미국에서도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테러가 극심해진 것은 역설적이게도 남북전쟁 이후 흑인노예가 해방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대놓고 이루어지던 시절에는 굳이 흑인만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테러를 저지를 이유 자체가 없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나마 미국인들로부터 관대한 대우를 받게 된 것도 아예 씨가 마르다시피 몰살당한 이후부터였다. 위협이 되지 않으면 무시하고 경멸하기는 해도 혐오하거나 증오하지는 않는다. 지금 일본은 한국을 혐오하기 위해 발버둥친다 싶을 정도로 그리로 자신들을 몰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째서 아베는 뻔히 예상할 수 있는 부작용들에도 한국정부를 상대로 수출규제라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는가. 이전에라면 다른 수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한국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었을 테지만 더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한국 정부를 유인하거나 굴복시킬 어떤 수단도 일본 정부에는 남아있지 않다.
벌써 오랜 추억과 같은 이야기란 것이다. 당연히 '일본이 없다'란 책은 전여옥이 국회의원이 되기 훨씬 전에 의미없이 집안을 굴러다니다가 다른 낡은 책들과 함께 재활용쓰레기로 버려지고 있었다.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의미없는 허황된 소리들인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된 탓이었다. 그리고 이제 일본에서는 혐한류의 책들이 코너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절찬리에 팔리고 있다. 그러니까 과연 일본인과 한국인 가운데 누가 더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 벌써 한참 오래전에 지나온 길을 이제 일본이 뒤따라 밟아오고 있다. 우리는 한참 저만치 버리고 지나온 것들을 여전히 오히려 더 강하게 부여잡고 놓지 못하고 있다. 새삼 그 뒤바뀐 관계가 뿌듯해지기도 한다. 정말 오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