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실도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술할 수 있다. 이를테면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다. 컵에 물이 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까 모두가 십시일반하여 그를 도왔다. 그로 인해 모두가 약간의 손해를 봤다.


시작은 최저임금이다. 급격한 최저임금의 상승으로 많은 자영업자들이 전보다 큰 인건비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카드수수료를 낮추는 정책이 발표되었다. 결국 카드사와 카드사 고객들을 희생시켜 자영업자들을 도우려 한다. 바로 내가 손해를 본다.


항상 기사를 쓰는 것이 이런 식이다. 원래 정책이라는 자체가 그렇다. 어느 하나에게 이익이 되면 다른 하나에게는 손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흑인을 위한 정책은 백인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여성을 위한 정책이 남성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손해와 희생을 감수해가며 그런 정책들을 펴는 이유는 그래야만 하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인이 양보하고 남성이 희생해서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흑인과 여성들의 처지를 배려해야 한다. 그러면 왜?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 필연과 당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무작정 백인이 남성이 피해보고 희생당한다. 당연히 백인과 흑인 사이에, 남성과 여성 사이에 갈등만 불거지는 원인이 된다. 


싸움을 붙이는 것이다. 처음에는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와 자영업자를, 이번에는 자영업자와 카드사를, 그리고 카드사의 혜택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을. 그렇게 결국 대부분 카드사용자를 오른 최저임금을 받게 될 노동자와 대립시킨다. 너희 때문에 내가 받는 혜택이 줄었다. 내가 카드를 사용하며 누리던 이익이 줄어들었다. 그러니까 너희의 임금을 정부가 올려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받는 최저임금은 나의 희생으로 인한 것이다. 결국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면 수수료 할인으로 손해를 보게 될 카드사를 위한 것이다. 과연 그동안 카드사들이 누리던 이익을 전부 소비자를 위한 혜택으로 돌렸겠는가. 그리고 언제부터 노동자가 그 모든 이익을 함께 나누고 있었을까? 하지만 최저임금으로 자영업자들이 피해보고, 자영업자들로 인해 카드사가 피해보게 되었으니까. 카드사 노동자와 소비자가 피해보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최저임금같은 건 올리지 말라.


다른 방식으로 기사를 쓸 수도 있었다. 카드사의 사회적 책임이라든가, 카드소비자와 자영업자의 나눔이라든가, 경기가 어렵다. 자영업자들의 페업율이 높다. 그렇다고 최저임금을 올리지 않으면 최저임금을 받는 다수 노동자들이 일을 하는데도 생활이 되지 않는다. 모두가 희생해야 한다. 모두가 양보해야 한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노동자의 소득을, 국민의 평균적인 삶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를 만들자.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 재미있는 것은 이른바 진보언론들조차 이런 식으로는 거의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타협보다는 갈등이고 투쟁이고 약탈이고 편취다. 너희가 죽어야 우리가 산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죽고 우리가 살아야 한다.


지금 갈수록 깊어지는 사회적 갈등의 골은 언론들에 의한 것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고 공존을 꾀하기보다 서로 자기 이익만을 주장하며 적대하기를 조장한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그리고 그 수단으로 정부의 정책이 쓰인다. 차라리 보수정부에서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문재인 정부를 망하게 하려고 아예 나라를 근본부터 절딴내려 한다. 이런 것이 언론인가. 그런 언론에 부화뇌동하는 정치는 또 무엇인가.


언론의 사회적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의 갈등과 대립을 조정하고 단합으로 이끈다. 보수는 보수의 입장에서. 진보는 진보의 입장에서. 이런 식으로 사회구성원간에 싸움을 붙이려 드는 언론이 주를 이룬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아침 신문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자영업자들이 이익을 보면 네가 손해를 본다. 카드사가 손해를 보면 네게 피해가 돌아간다. 그러니까 최저임금인상은 너에게 불이익이다. 도대체 뭘 바라고 그런 기사들을 쓰는 것일까. 역겹다. 원래 그런 놈들인 건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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