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다. 특히 한국 법정에서 성폭행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인정받기란 매우 어렵다. 마침 '뉴스룸'에서도 그 부분에 대한 분석이 있었다. 그냥 웃었다. '정조'라니. 아직도 이 나라의 법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정조와 성적자기결정권이란 얼핏 매우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의지다. 그리고 의도다. 성적자기결정권이란 인권과 같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배타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다르다. 정조는 자격이다. 얼마나 지키려 했는가.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 그러므로 피해자는 성적으로 순결하고 그 순결을 짓밟은 가해자는 법적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그 정조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한국의 법정에서 성폭행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폭력이나 협박 등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던 끝에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상태가 되어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피해자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더이상의 저항을 포기했어도 그 자체만으로 이미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아예 그러다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어야 비로소 성폭행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여성의 정조가 여성의 생명과 안전보다 더 중요하다.


사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다. 아니 직장인이 아니더라도 일상속에서 한 번 쯤 경험하는 것들이다. 자기보다 손윗사람이 무어라 하는데 대놓고 반박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불이익을 당하고 만다. 단지 의견을 묻고 권유하는 정도인데도 차마 자기보다 위에 있고 자신의 신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강요처럼 안되는 줄 알면서도 결국 따르고 만다. 위력이란 그렇게 대단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다. 조금만 대답을 머뭇거리게 만드는 정도로도 그것은 위력이라 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애정과 신뢰와 존경과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용한다.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동의한 것이나 같다.


그런 점에서 재판부의 판결문이 흥미롭다. 설사 피해자라 주장하는 김지은 씨의 증언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현재 대한민국의 법정에서는 그런 행위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다. 최소한 대한민국의 법정에서 설사 김지은 씨의 주장대로 성폭행 피해가 맞다 하더라도 성폭행이라 인정할 근거가 부족하다.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범죄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하지 못하는 이상 최대한 피고의 입장에서 그의 이익을 우선해서 판결해야 한다. 무죄라는 것이 아무런 법적 도덕적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가해자의 범죄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고의 낙인이 찍힌 억울한 피해자들이 현실에는 적지 않다. 물론 다수 남성들은 절대 이해하고 싶지 않는 부분들일 것이다.


확실히 이번 안희정 재판에 다수 남성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성범죄 수사와 재판은 유죄추정의 원칙이다. 오히려 성범죄 피해보다 성범죄 무고로 인해 억울하게 피해보는 남성들이 현실에는 더 많다. 성범죄를 신고한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역시나 그들에게도 성범죄의 기준은 정조에 있다. 평소 옷차림이 어떠했는가. 행실이 어떠했는가. 당일 피해자의 행동은 어떠했는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섬범죄에 저항하고 있었는가. 그러므로 성범죄가 아니다. 피해자라 주장하는 여성의 무고다. 지금까지 미투의 대상이 되었던 수많은 성범죄 가운데 그래서 그들이 인정하는 것은 명백하게 무고로 입증된 몇 가지 뿐이다. 자신들이 옳았다. 자신들이 승리했다. 정작 맥락은 보지 않는다. 어째서 여성들이,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재판결과에 대해 우려를 드러내는가.


무모한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폭행도 협박도 없는 단지 위력을 앞세운 성폭행을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니. 설사 주장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다수의 보수적인 남성들이란 사실이다. 민주당을 지지한다고 인터넷의 여론이 항상 진보적이기만 할 것이라 기대하면 큰 오산이다. 차라리 민주당이 자유한국당처럼 되기를 바라는 보수적인 개인들도 자유한국당을 지지할 수 없어 민주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남성 자신의 이해가 걸린 성문제에 있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과연 김지은씨는 불순한 의도로 안희정 전지사를 무고한 것인가. 안희정 전지사에게는 전혀 아무 잘못도 없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판결문만 가지고는 무엇도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냥 일반론이다. 여러 성범죄 사례에서 어떤 식으로 피해자는 피해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했는가. 어떻게 피해자 죄인이 되고 가해자가 되어 주위의 비난과 조롱 속에서 법적인 책임마저 떠안아야 했었는가. 그런데도 법정에서 판사가 판결했으니 옳다. 언제부터 그렇게 판사들을 신뢰했던 것일까. 하물며 김지은씨의 주장대로라면 재판 도중 판사의 입에서 '정조'란 말이 나오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물론 안희정 전지사가 억울할 수 있다. 김지은 씨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안전지사를 무고한 것일 수 있다. 그것과 별개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판결이 그리 내려졌다고 그것을 오롯한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제와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꿔 비난하는 것이 정당한가.


어차피 그래봐야 불륜이었다. 아무리 성폭행이 아니더라도 결국 자신의 비서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었다. 정치인 안희정이야 이미 폭로가 나온 순간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 다음의 문제다. 그러므로 성폭행이 아니었는가. 그렇다고 김지은씨는 무고를 한 것인가. 지켜본다. 판단의 근거가 너무 적다. 그래서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쓰지 않았었다. 한 면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너무 성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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