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보다 포괄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법률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아동에 대한 폭력, 노인에 대한 폭력, 장애인에 대한 폭력이 결국 같은 동기에 의해 일어나고 있으니까. 상대가 나보다 약하다.


폭력의 대상이 남성일 때 대부분 그 이유와 동기는 명확하다. 돈이 목적이거나, 아니면 평소 원한이 있었다거나, 그도 아니면 순간의 충동을 못이겼거나. 그래야 하는 것은 대상인 남성이 저항할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강할 수 있고, 아니더라도 상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적잖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래서 그마저 감수할 수 있다는 각오가 섰거나 아니면 그를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을 때 비로소 행동에 들어간다. 그에 비해 상대가 나보다 약한 어린이거나 노인이거나 장애인이라면 굳이 그런 각오나 준비같은 건 필요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폭력을 휘두르면 된다.


그래서 대개 이런 약자에 대한 폭력은 중독성을 가지게 된다. 내가 아무리 폭력을 휘둘러도 상대가 저항하기는 커녕 그저 무력하게 빌고만 있어야 한다. 내가 폭력을 휘두르는대로 비명을 지르며 눈물만 흘리고 있어야 한다. 내가 왕이다. 내가 절대자다. 내가 상대를 지배하고 있다. 한때 일본에서 유행하던 노숙자 사냥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학교 등에서 일어나는 소수자에 대한 왕따 역시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어차피 상대는 저항하지 못할 것이므로 마음놓고 자신의 욕망과 분노를 대상에게 토해낸다. 다만 그나마 노인의 경우는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아직 경로사상이 상당히 남아 있는 편이기에 그 대상은 대개 여성과 아이들이다. 물론 그렇다고 노인에 대한 폭력이 작은 것은 아니다.


같은 남성이 폭력의 피해자일 때보다 같은 여성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 남성보다 여성이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폭력과 마주했을 때 여성이 그를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기본적으로 근육량부터 큰 차이가 있다. 체격적으로 대부분 여성들이 남성보다 불리하며, 그나마 같은 체격조건에서도 근육량의 차이가 크다. 근육량의 차이 만큼 근력과 민첩성과 순발력의 차이 또한 따라서 커질 수밖에 없다. 남성의 경우 그래도 상대의 조건에 따라 오히려 거꾸로 제압하거나 최소한 저항하고 회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 만큼 더 여성의 피해가 여성들에게는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자신도 그같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아니 솔직히 남성이라도 다른 남성과 아무도 없는데 단 둘이서만 있게 되면 아무래도 꺼려지는 것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는 같은 상황에서 단순히 거리끼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를 느끼게 된다. 과연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었을 때 자신은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행위를 하려 할 때 자신은 그를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에서 여성에 대한 범죄가 남성에 대한 범죄보다 수치적으로 적게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극적으로 그런 상황을 피한다.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 자체를 적극적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를테면 밤늦게 혼자 다니거나, 아니면 여러 사람과 어울려 취하도록 술을 마시는 등의 행동들이다. 남성과 단 둘이 있으려고도 하지 않고 남성이 많은 자리도 잘 가지 않으려 한다. 남성들이 펜스룰 어쩌고 하기 이전에 여성들 스스로 남성을 경계하는 것을 몸으로 익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여성이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경우 가해자는 여성이 아는 사람일 때가 많다. 그에 대해 여성이 느끼는 감정이 어떻겠는가.


단순히 수치로만 보려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젠더폭력이란 그냥 폭력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범죄라는 것이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도 유사하다. 저항할 수 없는 약자를 대상으로 대상을 선별하여 이루어진 폭력이 대부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책 역시 일반 폭력에 대한 것과 전혀 달라야만 한다.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은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사회의 책임이며 역할이다. 구성원인 자신들의 책임이며 역할이다. 그런데 아동폭력에 대한 법률은 이미 오래전 제정된 바 있다. 하긴 법이 있어도 여전히 아동에 대한 폭력과 학대는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실 여기에는 남성의 책임이 아주 없지는 않다. 대부분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은 남성인 경찰관들은 오래전 그래왔던 것처럼 가정을 가장의 배타적 소유, 혹은 지배영역으로 인식하고 있다. 법이 있지만 정작 적극적으로 가정폭력으로부터 여성과 아이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왔다. 오히려 같은 남성인 가장을 위해 희생자들을 가장인 남성에게 돌려보내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그 결과가 얼마전 일어난 끔찍한 살인사건 아니었는가.


법이 지켜주지 않는다. 사회가 지켜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 무력하게 여성들은 남성의 폭력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었다. 차라리 자기가 흉기를 들고 남편을 살해할지언정 법은, 이 사회는 결코 자신을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절망과 좌절이 쌓이고 쌓이며 비로소 분노가 되어 터져나온다. 물론 남성들이야 미투 가운데 무고한 것들만 들어 남성의 성폭력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것이다. 남성에 의한 구조에 의해 철저히 성폭력이 은폐되고 피해자가 억압당하는 현실이란 원래 없었다고 외면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놈들이 주도하는 사회를. 그런 놈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집행되어지는 법과 제도라는 것을. 국가란 자체를. 그것을 아마 문재인 대통령은 '한'이라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제정된 여성폭력방지법은 한 마디로 그런 여성들의 불신과 불안에 대해 국가가 여성들을 지켜주겠다는 선언인 것이었다. 더이상 외면하지 않겠다. 더이상 방치하지도 않겠다. 물론 그 가운데 불합리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국가는, 그리고 사회는 여성들을 지켜야 하는 것인가. 여성들이 더이상 범죄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그럼으로서 달래준다. 국가는 여성의 편이다. 정부는 여성의 편이다. 이 사회는 여성의 편이다.


여성만이 범죄의 피해자인가. 여성만이 폭력의 피해자인 것인가. 하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남성을 향한 그것과 전혀 성격이 다르다. 동기도 다르고 목적도 다르고 과정도 다르다. 그런데도 같은 폭력이니 그냥 똑같이 처리하면 되는 것인가. 그러면 아동에 대한 폭력은? 노인에 대한 폭력은? 장애인에 대한 폭력은? 외국인이나 혼혈인에 대한 폭력은? 그냥 그저 다 같은 폭력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가만 보면 대상만 여성일 뿐 인종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구조를 외면한 채 어차피 상대와 나는 같다. 나와 대등하다. 출발선이 다른 공정함이 과연 공정함인가. 강자의 자기연민은 그 자체로 폭력일 수 있다. 새삼 깨닫는다.


전에도 썼던 글의 연장이다. 나야 아무때고 혼자서 불꺼진 골목길도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여동생은 불이 환한 길을 다니면서도 꼭 전화를 한다. 마중나와 달라. 그리고 나는 마중을 나간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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