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창천항로'에서 제갈량은 유비에게 어차피 중원은 조조가 가졌으니 중원에 집착하지 말고 천하를 넓혀보라 조언한다. 중원을 조조에게 맡기고 자신은 강동의 손권과 함께 중원을 벗어난 익주에서 새로운 천하를 열어 조조와 겨루도록 한다.


어차피 문재인의 대세는 현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거부할 수도 없고 거스를 수도 없다. 그것을 이재명이 보여주었다. 문재인의 대세에 정면으로 도전했다가 도리어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야권지지자들의 비토를 받아 오히려 지지율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저 완고해 보이는 문재인의 대세를 허물 수 있을 것인가. 야권 밖을 본다.


당장 여권에 이렇다 할 대선후보가 보이지 않고 있다. 대세라 여겨지던 반기문마저 어이없이 사그라들고 고작 물러날 때를 놓쳐서 대행을 맡게 된 황교안 따위가 유력 대선주자로 꼽히고 있다. 다른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황교안을 지지해야만 하는 보수유권자들도 스스로 알고 있다. 도저히 지지할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지한다 말하고는 있지만 대통령이 되기에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르다. 문재인은 커녕 야권의 어느 후보와 비교해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벌써 전부터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안철수를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유승민은 더욱 보수유권자들의 눈밖에 난 지 오래다.


전부가 아니어도 좋다. 만일 갈 곳을 잃은 보수유권자 가운데 일부만 자기에게 눈을 돌린다면. 지지할 대상이 없어 선거를 포기하려는 보수유권자 가운데 자기를 대안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다행히 완전국민경선은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경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반드시 당원이 아니더라도 당원과 똑같은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야권의 중원을 문재인이 선점했지만 야권의 외곽에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면 아주 승산이 없지는 않다. 야권지지자라고 해서 반드시 진보적인 성향의 유권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안으로서 가능성만 보인다면 보수에 대해서도 유연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려는 자신에게로 돌아설 유권자도 적지 않다. 그러면 만약의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


차차기를 가정한 터다지기이기도 하다. 당장은 박근혜의 폐정에 가까운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로 정권교체의 요구가 어느때보다 강하다. 하지만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어 정권교체를 이루고 난 다음에도 그럴까? 어쩔 수 없이 문재인의 민주당과 정의당까지 네 개 야당이 국회에서 정책이나 입법을 두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면 국민의 요구는 다시 화합과 공존으로 옮겨지게 된다. 싸우지 마라. 타협하면서 대화로서 정치하라. 국민만을 보라. 그리고 그런 때 일찌감치 보수정당과의 공존을 주장한 안희정이 전면에 등장한다.


어쩌면 문재인이 집권하고 후반쯤 안희정의 도지사임기가 끝나면 그에게 국무총리를 맡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보수유권자들에게도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안희정의 존재를 통해 야당이 될 보수정당과의 타협과 공존을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차기 대선은 무조건 안희정이 된다.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인간이 갑자기 튀어나와 대선을 낚아채지 않는 이상 문재인의 대세는 안희정의 대세로 이어질 수 있다. 여소야대라는 상황이 안희정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당장 차기 대선을 위한 민주당의 경선에서는 문재인에 밀리더라도 아직 안희정 자신은 젊고 많은 기회가 남아 있다.


물론 무조건적인 대연정은 아니다. 그럴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극성스런 야권의 핵심지지자들과 등을 돌리더라도 문재인과의 차별화를 시도한다. 이재명과 차이라면 굳이 문재인과 더구나 문재인을 지지하는 야권의 핵심지지자들과 야권의 중원을 두고 일부러 다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재인의 대세를 인정하고, 문재인을 지지하는 야권지지자들, 특히 당원들의 선택 역시 존중한다. 비판을 하더라도 선을 넘지 않는다. 경쟁을 하더라도 감정을 다치지 않는다. 매우 조심스럽지만 한 편으로 능수능란하다. 정치가로서 영리하다.


직접 부딪히며 싸우지 않았으니 감정이 다칠 일도 없고, 당장은 서운한 점이 있어도 다음 대선까지 시간은 4년이나 남았다. 무엇보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수유권자를 끌어올 수 있다면 자기에게도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 설사 아니더라도 그를 통해 민주당은 외연을 보다 넓혀갈 수 있다. 자신을 보고 지지를 선택한 이들 가운데 민주당에 남는 이들이 조금만 되어도 문재인의 외연까지 덩달아 넓혀진다. 서로 다투며 빼앗는 네거티브가 아닌 그 이상을 더해가는 포지티브의 전략이다. 결과적으로 당을 위해서도 이익이 된다.


의도적으로 역할을 나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당장의 경선은 물론 차차기의 대선까지 염두에 둔 지극히 치밀하고 정교한 행보라 할 것이다. 보수지지층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대선후보다. 국민의 통합과 화합을 꾀할 수 있는 유력한 대선주자다. 그 자리를 누구보다 먼저 선점하려 한다. 벌써부터 보수지지층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야권후보로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지금 안희정이 가진 가장 큰 강점이며 무기다.


아마 이재명으로서는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이재명은 너무 싸움을 많이 했다. 청와대와도. 정부와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기가 속한 민주당의 지지자들과도. 싸워야지만 무언가를 얻는 것은 아니다. 얻는 만큼 반드시 잃는 것이 있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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