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하나는 성범죄란 여성의 정조에 대한 범죄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대한 범죄란 것이다. 후자의 경우 다른 말로 성적자기결정권이라 말한다.


사실 익숙하기는 전자가 더 익숙하다. 수 천 년 동안 인간이 성범죄라는 것은 인식하기 시작한 이래 일관되게 지켜온 원리였을 테니. 여성은 출산을 위한 수단이며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자궁을 순결하게 지키고 관리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만에 하나 여성의 자궁이 그 순결함을 잃는다면 여성은 자격을 잃게 된다. 오히려 성범죄의 피해자인데도 가해자보다 더 큰 죄인이 되어 집단으로부터 단죄받는 경우마저 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과연 여성으로서 자격을 잃은 여성이 살 자격이 있는가. 그런 여성을 자신들의 일원으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인가.


그나마 문명화된 지금에도 여성이 성범죄의 피해를 당했을 때 그 자격을 묻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므로 과연 피해자는 자신의 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자신의 자궁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가. 여성이 자신의 성을 지키려는 노력을 포기했을 때 더이상 보호받을 자격도 잃게 된다. 폭력과 협박 등 한 눈에 보기에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받아야 한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성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그러나 더이상 어쩔 수 없이 강압에 의해 성범죄를 당하고 말았다. 다수 남성들이 생각하는 성범죄다. 어째서 여성은 그 순간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순간까지 저항하지 않았는가. 허점을 내보이고 가해자의 요구에 순응하고 말았는가.


반면 성적자기결정권은 그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자신의 성에 대해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침해하는 요소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를테면 자기가 비정규직인데 계약연장이나 혹은 정규직 전환에 대한 권한을 가진 직원이 어떤 부당한 요구를 한다. 물론 거절할 수 있다. 당당히 업무의 영역이 아님을 들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러지 못한다. 이른바 갑질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거부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범위와 한계를 넘어서 요구하고 강제한다. 더이상 저항을 포기했지만 그것이 과연 피해자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것인가. 간단한 예로 에이즈를 두려워해서 가해자에게 콘돔을 착용할 것을 요구했던 미국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더이상 저항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라면 그 안에서 최대한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지켜야 한다. 더이상 맞는 것도 고통을 겪는 것도 싫다. 그래서 저항을 포기하고 순응했다면 그것을 동의라 보아도 되는 것인가.


그동안 한국 법체계의 문제였다. 최근 드라마 '친애하는 판사님께'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었다. 성폭행 당시 체위가 어떻고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정황들을 들어서 피해자의 저항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나 따져묻게 된다. 다시 말해 피해자의 저항이 충분치 못하다 여겨질 경우 피해자는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마지막 순간에 저항을 포기했기에 강제이든 어쨌든 성관계는 이루어졌고 그것은 동의라 간주할 수 있다. 여성단체에서 그동안 현행 법체계나 법원의 판례들에 대해 반발해 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성범죄를 인정받기 위해서 가해자에게 맞아 죽으란 말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맞기라도 하라는 것인가. 거부의사를 분명히 드러냈는데 가해자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굴복했고 그래서 순순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 동의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여자의 거부는 거부가 아니다. 여자의 동의도 동의도 아니다. 여성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여기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할 대상으로만 여긴다. 여성이 거부했는데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다면? 여성이 동의했는데 그 또한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런데 그것을 왜 당사자가 아닌 타인이 판단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라 했으면 아니라 여기면 되는 것이고 안된다 했으면 안되는구나 여기면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안희정 전지사에 대한, 아니 그동안 여러 성범죄에 대한 다수 남성과 다수 여성의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과연 가해자로부터 현저한 폭력과 협박이 있었는가. 피해자는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인 노력을 했었는가. 그보다는 당시 상황에서 여성이 얼마나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런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성범죄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충돌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고, 부당한 행위를 당했음에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해야 했었다. 사실 대부분 직장인이라면 성범죄라는 사실만 제하면 대개 일상적으로 겪는 상황이기도 하다. 상사가 부당한 요구를 했다고 면전에서 사표를 집어던지고 아예 태업하는 경우란 현실에서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서로 입장이 갈리는 것이다. 서로의 주장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범죄의 판단에서 피해자의 저항여부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피해자로서 얼마나 피해자답게 행동했는가가 더 중요하게 판단의 근거가 된다. 반면 여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거부한 상황에서 피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해자의 행동이다. 적극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것을 알고 피해자의 거부에도 끝가지 자신의 욕심을 밀어붙인 피해자의 행동이 더 문제인 것이다. 만일 같은 상황일 때 자신은 그같은 요구를 거절할 수 있을 것인가. 비슷할지 모르겠다. 과연 같은 상황에서 남성들은 여성이 거절한다고 욕망을 뒤로 하고 물러설 자신이 있는가. 남성의 욕망은 상수다. 남성은 당연히 여성을 성적으로 탐하는 것이고 여성이 그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러려고 하면 그마저 남혐이라며 비난하는 또한 다수의 남성들이다. 여성은 남성을 위한 성적인 도구로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하여튼 재미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연말 회식후 성매매를 근절하려는 캠페인을 벌였을 때 요즘 세상에 성매매하는 남성이 얼마나 되느냐 반발한 바 있었다. 그러면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성매매여성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성을 팔고 있는 것일까.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경멸과 혐오를 감추지 않으면서 그런 성매매 여성들을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성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남성들은 성범죄에 있어 오히려 피해자들이다. 성범죄는 그리 많지 않은데 여성들에 의해 유죄추정으로 부당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성범죄자로 몰린다. 아무리 피해자가 거부의사를 밝혔어도 끝가지 저항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피해자다운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범죄가 될 수 없다. 다수 남성들이 성범죄자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범죄가 실제로 일어났다.


아마 배우 오달수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배우 오달수씨는 당시 성폭행당했다는 피해자에 대해 사귀는 사이였다 기억하고 있었다. 극단 선후배관계였다. 당시는 선후배 사이에 위계가 매우 강했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자기가 상대를 좋아하는 감정을 강조하는 사이 그에 대한 상대의 거부에 대해 소홀히 여겼던 것은 아닐까. 끝가지 거절하지 않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동의였다. 다수 남성들이 오달수는 억울하다 주장하는 이유다. 당시의 성의식은 그나마 지금보다도 더 처참한 수준이었다. 남자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했다. 남자가 오해하도록 행동한 여성의 잘못이었다. 여성에게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는지 모른다. 그나마 최근에 일어난 미투의 경우는 여성이 거부했을 때 물러났으니 최소한은 지켰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결과는 어쨌든 양식을 지켰다.


아무튼 현실에 너무 많다. 거절해야 하는데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 거부해야 하는데 거부할 수 없는 경우. 화를 내고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그럼에도 끝까지 웃음을 지어야 하는 경우들. 물론 진실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안희정 전지사가 옳을 수도 있고, 김지은씨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아직 법정은, 한국의 법은 성범죄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에, 최소한 새로운 성범죄에 대한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동의를 얻기에 미흡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주장에 동의한다. 끝가지 저항하지 않았으니 성범죄가 아닌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거부의사를 밝혔는가이며 결국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들은 개인 안희정이고 개인 김지은이었었는가.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다. 어째서 저들에게 안희정 전지사는 무고한 피해자인 것이고, 어째서 그 반대편에서는 재판이 부당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그래서 누가 옳은가. 현행법으로는 전자가 옳다. 전직대통령을, 그것도 고인이 된 이의 비자금을 불법으로 조사한 국세청장이 무죄로 풀려난 것도 바로 법에 따른 판결의 결과였다. 그래서 법은 과연 옳은가.


이해의 차이다. 성범죄란 무엇인가. 무엇이 성폭행이고, 어디서 어디까지를 성폭행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해 보이지만 그러나 아직 그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시끄럽다. 그런데 원래 시끄러운 것이 정상이기는 하다. 지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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