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1차산업이니 2차산업이니 나누는 것도 각 산업이 나타난 순서에 따른 분류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테면 아직 생산 자체가 부족하던 원시사회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생산 하나에만 매달려도 충분한 생산을 얻기 어려웠다.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고, 물고기를 잡고, 그리고 마침내는 농사를 짓고 가축도 기르게 되고. 당연히 지금도 오지의 원시사회에서는 공업이란 생산하는 짬짬이 조악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어 쓰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


어느 정도 생산기술이 발달하면 그러나 이번에는 사람이 남게 된다. 일정한 영역에서 직접 생산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농사가 급하다고 호남평야에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몰려간다면 될 농사도 안되는 것이다. 하물며 농사기술의 발달은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 자체를 비례해서 줄여주게 된다. 그러면 나머지 인구는 어디로 가야 하겠는가. 다행히 생산의 증가로 나머지 인구들까지도 모두 먹여살릴 수 있다. 그래서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들이 오로지 생산만 하며 살 수 있도록 그들이 필요로 하는 다른 일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당장 전근대사회에서도 도시의 임금노동자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밀려난 도시빈민들이었다. 더이상 농촌에는 농사지을 땅도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기에 무작정 도시로 올라와 노동력 자체를 수단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 종사했던 일은 생산 다음으로 중요한 공업과 상업이었다. 농사지은 사람들이 생산물과 바꾸어 쓸 수 있는 생필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2차산업 자체가 시작은 서비스업과 같았다 할 수 있다. 그만큼 생산자들은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더 나은 품질의 일상용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상공업마저 포화되어 사람이 남게 되자 이번에는 보다 개인들에 밀착하여 그들의 일상을 대신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뿌리는 아주 오래다. 그래서 2차산업 역시 원래는 서비스업의 하나였다 말하는 것이다. 시작은 노예였다.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의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직접 하지 않아도 되도록 부려지는 존재들이었다. 아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서비스업 종사자들에게 위세를 부리려 하는 것은 그같은 기억이 남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생산이 늘고 생활의 질이 높아지면서, 무엇보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 자체가 높아지게 되면서 보다 전문적인 노동력을 필요하게 되었다. 원래 부유한 집안의 하녀가 하던 일들은 언제부터인가 사회적으로 명성이 높은 전문가들이 대신하게 되었따.


당장 그같은 변화의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외딴 시골마을과 그와 이어진 읍내라 불리는 작은 소도시, 그리고 대도시의 비교다. 이촌향도니 뭐니 해도 시골마을 자체가 그렇게 많은 인구를 감당할 수 없는 구조다. 농업기술이 더 발달하고 보다 기계화되면 농촌에는 사실 지금의 인구도 필요없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사람이 없으니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생산하거나 파는 일도 그리 크게 일어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일상용품을 살 수 있는 가게마저 드문드문 마을 하나당 하나도 제대로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게주인 자신이 농사짓고 물고기잡고 밖에 나가 일하느라 시간이 맞지 않으면 물건을 구할 수도 없다. 그보다 진짜 필요한 일상용품이나 사치품은 보다 많은 인구가 왕래하는 읍내나 다른 도시에서 구한다. 사람이 있고 시장이 있고 수요가 있기에 일자리를 찾아 농촌이든 어촌이든 사람들은 그래서 도시로 향하게 된다.


서비스업의 정의부터 다시해야 한다. 서비스라는 자체가 개인의 편의나 안락을 돕고 대가를 받는 것이다. 그러면 편의나 안락은 무엇인가. 결국은 행복이다. 불필요한 노동에서 해방되어 보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에 자신의 노력을 쏟을 수 있다. 보다 자신의 일상에서 자유로워지며 진정으로 자신이 즐겁고 기쁜 일들에만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다. 가치다. 혹은 존엄이다. 개인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개인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삶의 질도 따라서 높아진다. 오래전 많은 사람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나가 일하기 시작해서 해가 지고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일만 해야 했다. 단지 개인은 생산을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생산이 늘고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 않게 되면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 과연 그 시간을 자신은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마저도 베를 짜고 새끼를 꼬고 짚신을 삼으며 생산을 위해 쓰기도 했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도 나왔다. 바로 온전히 자신을 위한 시간이며 자신을 위한 삶이다. 바로 여가의 존재로 인해 인간은 다양해지게 되었다. 모두가 거의 비슷한 복장에 일상을 누리던 것이 현대에 이르러 같은 사람이 없다 할 정도로 모든 것이 다양하게 분화되기에 이르렀다. 바로 서비스업이 존재한 이유다.


더 존엄한 삶을 살려 한다. 더 가치있는 인간이 되어 가치있는 시간을 보내려 한다. 그러려면 그런 자신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보장해야 하는 일들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장애인이나 환자, 혹은 노인을 위해 그들의 편의와 안락을 돕는 것은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 돈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일이 고단한 만큼 충분한 수입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장애인이나 환자, 혹은 노인이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가 산업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단순히 국가가 세금을 거두어 베푸는 것이 아니다. 세금이라는 대가를 받고 국가차원에서 개인에게 복지라는 서비스를 베푼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고용되어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게 된다. 이 급여는 그들이 당당한 경제주체로서 시장에 참여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복지란 과거 목민관들이 백성들에게 베풀던 시혜 수준을 넘어가지 않고 있다. 백성이 어렵고 고달프니 그를 가엾이 여겨 나라재산에서 일부 헐어 베풀어 도우려 한다. 그래서 일방적인 소비로만 여겨진다. 그래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공짜로 받아먿는 것이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낭비만 하는 것이라 부정적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 역시 인간의 기본권에 속한다. 인간으로서 자신을 비하하지 않고 열등감을 느끼며 좌절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일상을 보장하는 것 자체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여 사회를 안정시키는 역할도 하게 된다. 인간의 양심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비참한 처지에 놓인 타인을 보면서 우월함을 느끼기보다 상식수준의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심리적인 안정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양심의 만족이다. 그를 위한 비용은 당연히 개인이 지불하고 국가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그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다시 고용하게 된다. 더욱 생산기술의 발달로 필요한 노동량이 줄어들고 고용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줄어든 만큼의 노동력을 대신 고용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바로 문재인이 그동안 꾸준히 주장해 온 소득주도성장과 이번에 공약으로 내놓은 공공부문일자리창출이라는 공약은 이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하나로 이어진다. 어차피 정부가 사기업의 임금수준에 대해서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못한다. 필요없는 일자리도 더 늘리라 일방적으로 강요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일자리 자체가 급격히 줄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제 한계에 이른 지금의 경제상황에서 돌파구는 없는가. 그래서 인간을 찾아낸다. 인간의 존엄을 찾아낸다. 인간의 가치를 찾아낸다. 그를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과 그를 위해 필요한 투자와 자원들을 떠올린다. 하나의 산업이다. 어쩌면 마르크스가 진짜 예언한 미래의 공산사회일 것이다. 자본가들이 소수의 노동력만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을 위한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나머지 노동력을 정부가 흡수하여 진짜 인간 자신을 위한 일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자본은 이동하며 개인에게 분배되고 시장에서 순환한다.


아마 이전 다른 블로그에서 썼던 글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벌써 오래전부터 비슷한 주장을 해왔던 것을 알 것이다. 일하는 시간을 더 줄여야 한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을 더 줄여도 고용을 늘리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그 만큼을 결국 정부가 대신하며 정부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부의 역할은 더 커져야 한다. 어차피 지금의 경제조차 정부가 지는 막대한 빚에 의지해 지탱하고 있는 중이다. 미국이 더이상 빚지지 않게 되면 세계경제는 무너진다. 이제와서 정부의 역할이 너무 커져서 안된다고 말하는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정부에게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민간분야에서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기에 새로운 돌파구로서 정부가 나서고자 하는 것이다. 정부가 새로운 역할을 맡아 경제가 다시 살아날 숨통을 틔워주려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 자체가 경제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된다. 개인의 삶의 수준이 높아지고 그만큼 그를 위한 비용도 고용도 늘어난다. 돈을 써야 시장은 돌아간다. 아껴서 돈버는 시대는 산업혁명과 함께 끝난 지 오래다. 벌써 오래전부터 어떻게 써야 하는가가 더 중요해졌다.


당장 필요한 공공부분의 일자리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태다. 사회복지사들은 이미 과노동상태다. 소방사들도 부족하다. 경찰도 충분하다 할 수 없다. 사회의 각 분야에서 반드시 필요한 인력들이 단지 개인의 과노동에 의지해 돌아가고 있다. 공무원이 너무 많은 임금을 받아서는 안된다. 고용보장도 부당하다. 더 많은 공무원이 필요치 않다. 조선시대에는 그럴 수 있다. 미래를 본다. 가장 절박한, 그리고 필요한 정책들이다. 지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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