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끼리 모여서 여행을 가려 한다.


"일단 똑같이 나누고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얼마간 더 내도록 하자."


대부분 크게 불만이 없다. 어찌되었든 같은 돈이라도 벌이나 재산정도에 따라 부담의 차이가 있을 테니까. 그만큼 여유가 되기도 할 터다.


그런데 다시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려는데 변화가 생겼다.


"우리 가운데 두 명이 얼마전 일자리를 잃었으니까 아무래도 나머지가 더 돈을 내야겠다. 돈 더 많이 버는 너희가 돈을 더 내라."


어디가 잘못되었을까?


공동부담이다. 전과 같은 금액을 모아 같은 곳을 여행하려 해도 두 사람 만큼 갹출에 구멍이 생겼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 가운데 골고루 더 부담을 늘리고 돈 있는 사람에게도 조금 더 애써달라 부탁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런데도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핑계로 자기는 양보할 생각 없이 그저 돈 많은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희생하라 강요한다. 그 빌미가 된 사람들은 그러면 어떤 기분일까?


하물며 그냥 여행도 아니다. 목숨줄이 달린 일이다. 당장 아무거라도 일자리가 있었으면 한다. 안정되고 일정한 수입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정작 노동자의 권익을 대변한다는 노조가 기업과 정부에만 양보를 요구하며 자신들은 양보하기를 거부한다. 노동자는 사회적 약자라고. 그러나 노조를 만들 수 있을 정도면 노동자 가운데서도 그나마 일정수준 이상은 되는 노동자들일 터다.


물론 맞다. 노동자는 자본가에 비해 한참 약자다. 정부와 비교해서도 한참 약자일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개인은 몰라도 노동자의 집단인 노조라면, 그 노조가 모인 노총이라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과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그를 이용해서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서도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노동이란 걸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마저 안되는 다른 노동자들이나 아니면 노동자조차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은 아주 조금의, 공기청정기로도 걸러지지 않을 초미세먼지 한 톨의 무게만큼도 책임이 없는 것일까?


노조는 노동자의 이익집단이 맞다.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럼에도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조차 아닌 사람들마저 그들의 투쟁을 지지한 것은 그들의 투쟁에 사회가 공유해야 할 공공의 가치가 담겨 있다 여기기 때문이다. 노조의 이익이 노동자의 이익이며 장차 노동자가 될 시민 다수의 이익이다. 그런데 정작 노조가 노동자가 되지 못한, 아니면 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시민과 노동자의 입장을,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사회적 책임을 완전히 외면한다. 조금도 자신의 이익을 양보할 생각이 없고 지금 누리고 있는 권리들을 희생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그것들은 오로지 기업에게만 가서 찾으라. 기업이 언제부터 그렇게 마음좋은 자선사업가들이었는가.


기껏 노동자들의 편에 서려는 정부를 맞으니 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떼쓰는 것 뿐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을 더 늘려달라.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배려해 달라. 그래서 어디서 그것들을 가져오느냐 말하니 기업들에게서. 그래서 그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얼마간 양보할 생각이 없는가 물으니 그것도 기업에서. 대기업이라면 진저리를 치던 사람도 여기까지 오면 머릿속이 차가워진다. 저것들은 뭐하는 것들일까? 과연 저들의 시민의 가치를 위해 마땅히 지지해야 할 이 사회의 책임있는 구성원이 맞는 것일까. 저들의 존재와 행동이 이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럼에도 여전히 같은 계급적 이익을 공유하는 동류이자 사회적으로 연대해야 할 대상인 것인가. 나에게 저들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대상일까?


광주형 일자리라는 것이 괜히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일자리 문제가 심각하고, 많은 이들이 일자리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도 노조가 먼저 앞장서서 자신들의 권리를 양보하고 희생하며 일자리나누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그만큼 받는 급여도 줄이고, 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한다. 그것이 노조가 가지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더 많은 노동자와 노동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연대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그런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자가 되지 못한 더 빈곤한 약자들을 위해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희생하고 있었는가.


정부도 절박하고 광주 시민들도 절박한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만 여유롭다. 실업률이 치솟고 덕분에 최저임금 인상으로 인한 노동소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체 소득이 하락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여전히 저들만은 전혀 급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좋은 일자리들이 있으니까. 안정되고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급여까지 충분한 일자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 너희들 사정따위 내가 아랑곳할 바가 아니다.


최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노조들의 주장이 일견 타당함에도 도무지 그에 대해 동의하기가 어려워지는 이유다. 과연 저들과 내가 계급적 이익을 공유하는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노동자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사회 전체가 함께 살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디까지 어떻게 양보할 수 있는가가 그 사회의 유대와 연대의식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피로 이어진 가족이라면 보증을 세우고 돈만 갖고 튀었어도 때로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 그저 어깨만 살짝 스쳤어도 이마에 핏줄이 선다. 그러니까 저들은 사회적 연대를 바라는 만큼 사회를 위해 어디까지 어떻게 무엇을 양보하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많은 이들이 노동운동에 몸담았었고 실제 노조지도부에 있었던 이들마저 있음에도 정부와 여당이 최근 부쩍 노조들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이유인 것이다. 그동안 어지간해서는 노조들을 비판하지 않던 나마저 인상을 찌푸리며 저들과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는 이유다. 저들은 동류가 아니다. 저들은 내가 연대할 대상이 아니다. 저들과 나는 다르다. 저들은 나를 위해 무엇도 어느것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그러면 나만 저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동의하며 지지해주어야 하는가. 노동자라는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린다.


함께 돈을 나누기로 했다는 것이다. 함께 돈을 나누어 여행을 가기로 했던 것이다.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되었든 모두가 돈을 나누고 여유있는 사람에게 돈을 더 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옳다. 노동운동만이 아니다. 세금도 마찬가지다. 복지를 늘리고 싶다. 모두가 누리는 혜택을 늘리고 싶다. 부자들만 더 세금을 내라는 것은 부당하고 불공평하다. 모두가 함께 더 많이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여유있는 이들이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 얌체들이다. 누리기만 하고 책임지려고는 않는다.


새삼 확인한다. 과연 나는 저들과 같은 노동자일까. 노동자로서 연대했던 나는 저들이 생각하는 같은 노동자에 속할까? 노동자가 되지 못하면 저들로부터 어떤 배려도 양보도 받을 수 없는 것일까? 그러면 실직자일 때 나는 왜 저들을 지지하고 응원했던 것일까? 본전생각이 나면 그 관계는 끝난 것이다. 이대로 끝내고 말 것인가. 그동안 노조들의 싸움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힘을 가질 수 있었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별은 항상 씁쓸하다. 서럽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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