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전글에 더해서 그렇다면 시대가 바뀌어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평균적인 삶의 수준이 높아진 뒤에도 여전히 노동이란 전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가. 다시 말해 풍년이 들어 쌀이 넘쳐나는데도 여전히 농민들은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야 하는 것인가. 굳이 풀뿌리와 나무껍질이 필요하면 전보다 더 비싼 비용을 치르고 농민들을 고용해 부려야 할 것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에 그렇게까지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가. 물론 부족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정작 일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을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사업장 역시 상당할 것이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크게 이슈가 되고 있는 편의점만 하더라도 일하다가도 바로 뭐라도 마음에 안드는 것이 있으면 바로 그만두고 안 나와 버리는 경우가 실제 상당할 것이다. 어차피 최저임금이니까. 아무데나 가도 그 만큼은 당연히 받을 테니까. 열심히 오래 일한다고 더 좋아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개는 오래 일한다고 시급을 올려주거나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어차피 아무일이나 해도 상관없다면 굳이 성에 차지 않는 이 일로 자신의 노력과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벌써 오래 되었다. 대기업에는 사람이 모이는데 중소기업은 사람이 필요해도 오려고 하는 사람이 없다. 특정 직종에는 사람들이 모이다 못해 아예 썩어나고 있는데 어떤 직종은 외국인이라도 데려다 쓰지 않으면 유지조차 불가능하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디는 사람을 안 뽑아 난리고, 어디는 사람이 안 와서 난리고, 그런데도 일자리는 부족하다며 모두가 심각하고. 그냥 요즘 젊은이들은 고생하는 걸 싫어한다는 꼰대스러운 한 마디로 넘어가고 말 것인가. 어째서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소득주도성장이란 소득의 평준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하다. 최저임금이야 정책을 통해 정한다 할지라도 그 이상의 임금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와 사정에 따라 임의로 정하게 될 것이다. 그것까지 정부가 나서서 통제한다는 것은 그럴 이유도 의미가 없는 월권에 지나지 않는다. 인건비가 부담이 된다면 중위수준 이상의 임금의 인상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최저임금은 오르고 최고임금은 억제되며 평균이 맞춰진다. 이를테면 동일노동 동일임금일 것이다. 노동가치설이 맞다면 결국 노동자 개인이 가지는 노동의 가치는 동일하다. 나이가 더 많고 경력이 더 많아도 다니는 직장이 어디든 노동의 가치는 동일하게 계량되어야 한다. 그를 통해서 전체 노동자의 소득과 생활의 평균은 상승되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시장에도 왜곡이 적다. 아무데서 어떤 일을 해도 최소한의 평균적인 삶은 보장된다. 굳이 일을 가릴 필요가 없으니 일자리의 편항도 줄어든다.


소득주도성장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한 이유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중소상공인의 격차를 줄여야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그냥 최저임금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시장의 편차를 줄여 아래로부터 그들의 조건 역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가 노동자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평균적인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바로 노동자가 노동을 하는 이유다.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누리며 인간으로서 갖추고 누려야 할 것들을 갖추고 누리며 살 수 있다. 노동자가 자신의 삶으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일을 해서 최소한 남들이 사는 만큼 살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실제 일을 하는 만큼 남들이 사는 만큼 산다는 보람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의 신성함이다. 일을 해서 비참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닌 일을 하기 때문에 당당하고 자랑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일이 되었든. 어떤 일이 되었든.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정작 일을 하는데도 최소한의 평균적인 삶조차 기대할 수 없다. 그럼에도 단지 인내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어차피 최저임금 올랐다고 사용자가 해고하지 않아도 더이상 노동으로 인한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면 노동자 역시 노동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충분한 대가를 누릴 수 없다 여기면 노동을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사람을 구해도 사람이 없고, 기껏 사람을 구했어도 금방 그만두고 하는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고 이미 그러고 있었다. 그런데 그저 일자리 줄어드는 것만 걱정하는가.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이 오로지 공무원에만 목을 맨다 한탄하면서 정작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데는 소홀하다. 편한 일자리만 찾는 것을 뻔히 알면서 힘든 만큼 대가를 지불하는 것조차 방치하고 있다. 한 편에서는 일하려는 사람이 줄어드는 가운데 그저 일자리 줄어드는 것만 눈에 들어온다.


일자리가 없지 않다. 당장 내가 하는 일만 해도 사람이 없어 항상 걱정이다. 덕분에 없는 사람 몫까지 하느라 나 역시 매일이 피곤하고. 그렇다고 사람들더러 해보라 자신있게 권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없음을 나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더 열심히 더 잘하라 강조하지만 사용자 쪽에서도 굳이 그것을 강요하지 못하는 것도 어차피 그 이상 챙겨주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괜히 일방적으로 강요해봐야 결국 그만두는 사람만 늘어날 뿐이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현실과 다른 또다른 현실이다. 그나마 최저임금이 올라 내년부터는 그럭저럭 월급받아 약간의 사치도 하며 살 수 있을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조금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될까.


일자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도 사라진다. 노동자를 고용하려는 사용자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굳이 자신의 노동을 팔려는 노동자 역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줄어들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시대다. 그래도 되는 시대다. 풍요의 대가다. 그런데도 여전히 더 싸게 더 힘들게 일만 하라 강요한다. 출산률이 갈수록 떨어지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 모른 척 하거나 진짜 모르거나. 한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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