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유럽에서는 아이들이 일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 사는 부모들이 적지 않았었다. 부모들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또다른 형제나 자매들 또한 자신들의 형제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장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겨우 빵을 사서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린 나이의 아동들을 고용해서 일시키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과연 아이들의 노동으로 겨우 먹고 살던 가정들은 그때 어떻게 되었을까?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많은 저개발국가에서도 아동노동이 법으로 금지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럼에도 암암리에 혹은 공공연히 어른에 비해 임금이 싼 아동들을 고용해서 장기간 노동을 착취하는 것이 적잖이 일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고용하는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상품을 사가는 이들이 요구하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서. 그리고 부모의 입장에서도 그런 아이들이라도 나가 일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곤궁한 형편 때문에.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서서 아예 아이들은 일시키지 말라고 하면 사용자는 인건비 지출이 늘어나 단가를 맞추지 못하게 될 것이고, 부모들은 더이상 아이들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장 아이들 자신부터 일하지 못하니 돈도 벌 수 없을 텐데 아동노동금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법일 것인가.

 

노예로 있을 때는 굳이 일자리 걱정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았었다. 당장 몸을 뉘일 집도, 하루를 연명할 빵도 굳이 자기가 나서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결혼까지 주인이 알아서 시켜주었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래도 주인 소유이니 자기 재산이라고 기를 수 있도록 해주었고 어디 내다 팔더라도 자식의 장래로 고민할 이유 역시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노예를 해방했더니 주인 앞에 엎드려 제발 내쫓지 말아달라 사정하는 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내가 나 편하자고 노예로 있겠다는데 어째서 국가가 나서서 그마저 방해하는 것인가. 이것이 자유이고 이것이 자본주의인가.

 

하긴 그러고보면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불과 수 십 년 전이다. 외삼촌이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모르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집을 나가 어디 공장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집안의 사정으로 인해, 혹은 주변의 유혹에 이끌려 공부보다는 일찍부터 나가서 일을 해야만 했던 아이들이 현실에서도 적지 않았었다. 새벽같이 밥을 지어 아랫목에 묻어두고 일을 나간 어머니는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돌아오시곤 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혼자서 라면도 끓여먹어야 했었다. 아이들이 일을 해서 겨우 먹고 살던 집에서 아이들이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는 날도 없이 아이들 얼굴도 보지 못하고 일하던 부모들 역시 법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돈도 받지 못하고 아침과 저녁을, 그리고 휴일 동안 집에서 강제로 쉬어야만 했었다. 과연 그 법은 누구를 위한 법이었을까?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야 당장 오늘 먹을 것도 걱정인데 아이들도 일찌감치 제밥벌이를 하도록 시키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면 한 시간이라도 더 일해야 하니 쉬는 날도 사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냥 아예 노예로 들어가는 것도 나을 수 있다. 그저 먹고 입고 자는 것 해결해주고 아이들까지 키워주면 그냥 사고 팔 수 있는 재산이 되어 시키는대로만 일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갑질이라 떠들어대지만 사용자가 폭언을 내뱉고 폭력까지 휘두르는데도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사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과연 그런 사회가 옳은 사회인가. 설사 자신들이 원한다고 해도 그러도록 허용해주는 사회가 바른 사회인가.

 

하다못해 종이 다른 동물에 대해서도 필요 이상 고통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동물보호법이 우리나라에서도 선진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단 시행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봐야 어차피 먹자는 소이고 먹자는 돼지인데 그런 소와 돼지의 권리까지 인간이 챙겨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양심인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존엄이라 여기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에 느끼는 모멸감과 수치심이다. 불쾌감과 불편함이란 감정으로 표현되고는 한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현대의 법은 설사 자신이 원했고 정식으로 계약까지 마쳤어도 온전히 인신을 구속하는 노예라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은 편할지 몰라도 세상이 불편하다. 자신에게는 좋을 지 몰라도 세상의 사람들에게 좋지 못하다. 인간이라는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란 것이다.

 

이를테면 구직을 하는데 당장 내가 급하다고 비슷한 스펙에 비슷한 경력으로 급여를 반만 받겠다 하는 경우와도 비슷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야 내가 급하니 그 정도 받는다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스펙과 경력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그로 인해 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급여를 낮춰 일을 구해야만 한다. 나는 편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불편해진다. 내게는 이익일 수 있지만 나와 비슷한 처지의 더 많은 사람들에게는 손해가 될 수 있다. 하다못해 상품도 덤핑이 안되는데 인간을 덤핑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당장 급하니 쉬는 날도 없이 하루 20시간도 기꺼이 일하겠다. 그러니까 원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 이런 게 이기주의다. 그렇게 일하고 싶으면 차라리 다른 일을 하나 더 구해서 그만큼 더 일하라.

 

엄밀히 최저임금인상이나 근로시간단축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는 사회정책에 가까울 것이다. 탄력근로제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란 수단이 아니다. 인간은 오로지 목적이어야 한다. 모든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대전제다. 과연 현재 시점에서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의 조건이 무엇인가. 하루종일 일만 하느라 아이들 자는 얼굴만 봐야 하고, 겨우 쉬는 날에도 피로를 푼다고 하루종일 잠만 자며 가족과도 시간을 가지지 못한다. 자신을 위한 취미를 가지지 못했으니 겨우 여유가 생기면 하는 일이라는 게 술마시고 멍때리는 것이 고작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영업의 비율이 유독 높은 이유 가운데 하나다. 퇴직하면 할 게 없다. 집에서 놀지는 못하고 다른 가치있는 일도 찾지 못하고 그래서 아무 준비없이 무작정 일해야겠다고 창업부터 한다. 그리고 말아먹는다. 어떻게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는가. 어쩌면 당연한 그런 기본부터 대부분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사회가 정상인가. 그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정상인가.

 

사실 말이 소득주도성장이지 정작 필요한 정책 가운데 최소한도 시도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복지를 늘려서 노동시간이 줄고 수입이 따라서 줄더라도 최소한의 삶을 누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한다. 일단 의료비는 줄였다. 아이들 고등학교까지 교육비도 줄여주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굳이 욕심내서 비싼 과외만 시키지 않으면 더이상의 지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대한 투자도 갈수록 늘려갈 것이다. 노후에 대한 대비도 충실하게 갖추어야 한다. 그러니까 오늘 번 돈을 오늘 다 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늘 번 돈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도 전혀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돈을 쓸 만한 여가를 준다. 문제는 이와 관련한 모든 법안이 야당의 반대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당장 취직을 걱정해야 하고 아이들 기를 일을 걱정해야 한다. 당장 오늘 먹을 빵을 걱정해야 한다. 한 시간을 덜 일하는 만큼 벌이가 더 줄어들게 된다. 그러니까 다시 노예로 돌아가야 할까? 다시 19세기로, 아니 불과 수십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인가. 그때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할 수 있었고, 아이들까지 일시켜서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었다. 물론 그 돈은 생활비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돈이었다. 최저임금을 낮추면 노동자의 소득이 늘어난다. 최저임금만 낮추면 저소득층의 소득이 늘어난다. 그러니까 소득이 없다면 여가란 휴식이란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사회인가.

 

하여튼 언론이 떠들어대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19세기 유럽이야 말로 이상사회였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야 말로 노동자의 천국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IMF로 그 신화가 끝났어야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박정희를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다. 21세기에 1970년대의 경제논리를 끌고 온다. 과연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다시 지금에도 노예제를 허용하고 아동노동까지 허락해야 하는가. 너무나 당연한 말이라서 반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겠다.

 

21세기에 20세기의 경제논리를, 그나마 선진국에서는 이미 19세기에 끝난 주장들을 들고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신자유주의마저 수명이 다한 지금 그들이 추구하는 경제이론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크게 상관할 필요가 없다. 이제와서 새로 노예를 만들수도 아동노동을 허락할 수도 없다. 너무 당연한 것이다. 기자새끼들부터 휴일 없이 최저임금 이하만 주고 일시켰으면 좋겠다. 월급 많이 받는단 소리다. 쓰레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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