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동아시아의 왕과 대신들을 걱정이 많았었다. 백성들이 농사는 짓지 않고 허황되게 장사해서 돈 벌 궁리만 한다. 법으로 강제해서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장사를 그만두고 농사를 짓도록 해야만 한다. 

 

하긴 동아시아만이 아니다. 유럽에서도 농민을 농지에 묶어두는 농노제를 시행한 이유가 자칫 농민이 이탈하여 농사지을 노동력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농사를 지어야 생산이 늘고 백성도 굶지 않고 나라도 부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당시에도 개인이 큰 돈을 벌려면 농사보다는 장사를 해야만 했었다.

 

원래 기술이 발달한다는 자체가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양을 늘려가는 과정인 것이다. 예전에는 100명이서 겨우 할 수 있는 일들이 기술의 발달로 90명으로, 80명으로, 70명으로,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혼자서 그 이상의 일들도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직접 노동자들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팠지만 이제는 포크레인 한 대면 그 몇 배의 일을 하루만에 해치울 수 있게 되었다. 종자를 개량하고, 농기구를 새로 만들고, 농사법도 새롭게 찾아내고, 그 결과 한 사람이 몇 배의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면 그만큼 일정 면적의 농지를 경작하는데 필요한 노동력의 수는 줄어든다. 그러면 더이상 필요없게 된 농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산업혁명 이전부터도 유럽에서 농민의 수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었다. 전체 인구 가운데 농민의 비율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경작지는 늘어가는데 오히려 농민의 수는 줄고 고향을 떠난 유민과 도시로 흘러든 도시빈민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했었다. 아마 그래서 당시도 그와 관련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을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더이상 농사지을 땅이 없어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산업혁명 이후로도 제조업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었다. 처음 공장노동자들은 하루에 10시간 넘게 거의 휴일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어느새 하루 8시간, 토요일까지 제외한 5일 근무로 정착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노동자 한 사람의 전체 노동시간이 극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전혀 차질없이 생산은 이루어지고 있었고 오히려 그를 통해 생산된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면 기술의 발달과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더이상 전처럼 일정한 가치를 생산하는데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비례해서 기술의 발달과 산업의 고도화에 비례해서 제조업 노동자의 비율은 선진국들에서도 줄어들고 있었다. 굳이 한 사람의 노동자만 있어도 필요한 만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굳이 한 사람 더 고용할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웃긴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연합뉴스에서 GDP대비 취업자수라는 희한한 기준을 만들어 한국경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었는데,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더 적은 취업자수만으로 그만큼 더 많은 GDP, 즉 가치를 생산해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그토록 보수언론들이 노래를 부르던 한국경제의 노동생산성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더 적은 노동력만으로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는데 굳이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당장 매출과 순이익에서 세계톱클래스에 꼽히는 삼성전자지만 정작 국내에서 직접 고용한 노동자의 수는 10만 남짓이다. 물론 다른 관계기업들이나 해외법인까지 포함하면 숫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만큼은 아니다. 어째서이겠는가. 반도체 하나 만드는데 도대체 사람의 손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굳이 불필요한 고용을 더 늘리겠는가 말이다. 자동차 역시 대부분 공장들이 자동화되어 있어 이제는 아예 있는 노동자들도 줄이겠다 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데도 제조업 일자리가 줄었으니 나라 망했다. 경제 망했다. 정책 망했다.

 

어째서 제조업 일자리가 줄고 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이고 그렇다면 그 대책은 무엇인가? 어쩔 수 없이 1차산업도 2차산없도 생산성이 오르며 고용이 줄어들면 3차산업에 기대야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 자영업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벌써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이 비판해 온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 서비스업은 대부분 소비성이다. 대부분 전문기술도 자본도 열악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듯 창업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버는 것이 프랜차이즈들이다. 부족한 전문성과 자본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창업할 수 있다고 프랜차이즈로 몰린다. 그만큼 취약하다. 유행과 경기에 따라 하루아침에 망해나가는 자영업이 속출하게 된다. 자본은 몰라도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생산적인 분야에서 종사하는 서비스업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안정적으로 3차산업인 서비스업이 한국경제의 한 축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 정부는 이 사회는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그런데 오히려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만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다. 노동자가 더 적은 임금만 받고 더 오랜 시간 일해야 제조업 일자리도 늘어난다. 진짜? 자신하는가?

 

심지어 공중파 언론들에서까지 이런 터무미없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게 내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경제가, 한국 사회와 인류의 문명이 어느 단계에 왔고 그렇다면 어떤 고민과 궁리가 필요한가 전혀 고려치 않고 그냥 관습적으로 관성적으로 해오 던 말을 반복하는 것 뿐이다. 과연 어떻게 하면 제조업의 고용을 늘릴 수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도시의 빈민들로 하여금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할 수 있겠는가. 스마트팩토리라는 게 뭔지도 모른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게 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고용형태는 어떤 것이며 그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와 대비를 해야 하는가. 그런데도 그저 제조업. 그저 제조업 일자리. 그것은 과연 비판인가 대책인가? 그런 비판들에 지금 어떤 의미가 있는가.

 

결국은 소비사회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여러 정책들을 통해 그것은 이미 입증된 바다. 카드대란으로부터 대출대란까지, 그렇게 끊임없이 빚으로 만들어 온 내수를 공식화 본격화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치로 여겨졌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기본으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갈수록 늘어나는 노인들을 위해서라도 그들을 위한 보건과 복지 서비스는 당연하게 주어져야만 한다. 오히려 미래의 한국경제를 위해 필요한 일자리다. 보건과 복지란. 공공서비스란. 그런데도 그런 일자리가 늘어났다 비판한다. 저출산시대에 아이들을 보살피고 가르치는 일자리와 고령화시대에 노인들이 안정된 건강한 삶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일자리마저 저급의 잘못된 일자리들이다. 지위와 대우가 불안하고 열악하다면 그것을 개선해야지 필요없는 일자리라는 것은 예전에도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관성과 믿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우리 사회와 경제가 나아갈 방향이다. 이 역시 전부터 주장해 오던 바일 것이다. 생산에 더이상 사람의 노동력이 필요 없다면 소비를 통해서 고용을 만들고 경제를 움직여야 한다. 선진국들에서도 시작된 고민들이다.

 

그냥 수준이 안되는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고 고민하기는 더 싫고 그래서 그냥 하던대로 끄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제조업인가? 어째서 보건과 복지의 일자리는 안되는 것인가? 공공부분에서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이 왜 문제인 것인가? 그냥 예전에는 그랬으니까. 세상은 바뀌는데 자기들만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투덜거리고 있다. 그런 게 꼰대다. 그런데 젊은 꼰대들은 왜 이리 많은지. 더이상 제조업의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던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 않듯이.

 

벌써 오래된 이야기다. 내가 관련한 책을 읽은 것이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한참 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변화들을 지켜봐 왔다. 여러 지표들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다. 다만 저들만 모른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기레기다. 한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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