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말한 바 있을 것이다. 자기연민에 빠진 사람은 위험하다. 자기를 지나치게 불쌍하게 여기는 나머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되기 쉽다. 이른바 한국인의 정이란 것이다.

 

한국인의 정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자기보다 너무 잘난 사람에게도 자기보다 너무 못한 사람에게도 그 특유의 정이란 것이 발현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정이란 것이 실제 발현될 때도 대개는 상대의 입장에서보다 자기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베풀고자 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자신의 선의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바로 분노하고 원망하게 된다. 정이란 이름의 선의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닌 바로 자신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이라 말한다. 한국인에게는 한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 그보다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내가 가장 불쌍하다. 내가 가장 가난하고 내가 가장 힘들고 어렵고 내가 가장 불행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를 얻기 위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는다. 서로 돕는 가운데 있을 곳을 찾은 듯한 안도감을 느낀다. 그래도 같이 힘드니까. 같이 어렵고 괴로울 테니까. 그래도 나누면 조금 더 수월하게 견딜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 그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보인다. 자기보다 더 불쌍하거나 자기와 비교할 수 없이 전혀 불쌍하지 않아 보이거나. 타인이 되는 것이다.

 

확실히 보수언론이나 보수정당이나 그런 점에서 대중의 심리를 제대로 읽고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적확하게 한국인의 심리가 가지는 허점을 꿰뚫었던 것이다. 같은 부모 입장에서 자식을 잃은 심정에 공감하기보다 그로 인해 그들이 받게 된 보상들에 집중하게 만든다. 피해자 자신이나 그 가족들이 그로 인해 받게 된 관심과 누리게 된 혜택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그들보다 내가 더 불쌍하다. 내가 더 힘들고 어렵다. 그러니까 저들이 말하는 것은 들을 필요가 없다. 아니 저들이 떠드는 괴롭고 슬픈 사연들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가식이 된다. 심지어 적대하게 된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이, 혹은 그를 지지하거나 그와 연관된 인사들이 세월호와 관련해서 끊임없이 망언을 뱉어내고 그럼에도 오히려 지지율이 오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단한 시절을 지나온 이들일수록. 그만큼 힘든 현실을 견뎌야 하는 이들일수록. 그럼에도 작은 성공이라도 이룰 수 있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자기들은 이런데. 자기들은 이렇게까지 살아왔는데. 그러면 저들은. 그런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다.

 

과연 세월호 망언으로 인해 자유한국당의 지지율이 일정 이상 떨어지는 경우란 있을 것인가. 오히려 당장 설문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희생자를 모욕하고 피해자를 부정할수록 그들의 지지는 더욱 오르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최저임금 논란도 비슷하다. 근로시간단축에 대해서도 맥락은 비슷하다. 보수언론이 항상 떠드는 소리다. 네가 더 힘들다. 네가 더 불쌍하다. 그러니 남의 사정따위 돌아보지 말라. 사회를 파편화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 생각하게 만든다. 입으로는 국론분열을 걱정하며 사회통합을 외치는 그들이.

 

원래 한국인의 정이란 것을 잘 믿지 않았었다. 그 정만은 이웃의 실체를 수도 없이 아프도록 겪어 온 때문이다. 가난한 동네에 정은 넘친다. 물론 정이 넘친다. 다만 그 정의 실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 뿐.

 

망언일까? 아니면 어떤 사람들에게 속시원한 용기있는 발언이었을까? 그런 사람들이 더구나 기성세대에서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한국사회의 비극이기도 할 것이다. 보편적인 정의나 윤리 같은 것이 아니다. 공감능력도 없다. 슬픈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