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란 무엇을 위해 돌아가는가. 자본주의는 어떤 원리로 굴러가는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자본주의란 자본 그 자체를 생산수단으로 삼는 경제체제다. 따라서 당연히 자본주의는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구성원의 이기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원리이고 동력이다. 여기서 답이 나오지 않는가.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자본의 이익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모든 기술의 발전과 혁신은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더 적은 자본으로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모든 기술의 발전과 경영상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 자본을 가진 사람은 누구이며 자본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다.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은 결국 노동자의 임금이 아무리 올라도 그 이상 자본의 이익이 다양한 이유로 실현되기에 그 격차가 더 벌어지게 되는 결과인 것이다. 심지어 노동자의 임금이 정체되어도 자본의 이익은 계속 늘기만 한다.


비유하자면 봉건사회에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지주는 토지를 생산수단으로 삼고 소작농은 노동력을 생산수단으로 삼는다. 같은 생산수단이라도 토지는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그 소유를 늘릴 수 있는 반면 개인이 소유한 노동력은 한정되어 있다. 즉 각자 자기가 소유한 생산수단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계산하더라도 지주는 자신이 소유한 토지에 비례해서 더 큰 이익을 남길 수 있다. 더구나 봉건적 생산양식에서 소작농의 노동력은 지주의 토지에 종속되어 있으므로 소작농의 노동으로 증가한 생산은 곧 토지에게 상당부분 귀속되기 쉽다. 소작농 자신의 노력에 의해 실현된 이익이 오히려 지주의 이익으로 귀속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즉 소작농 한 사람이 이전보다 두 배의 경작지에서 세 배의 농작물을 거둬들였다 했을 때 지주는 단지 소작농 한 사람을 더 줄이고 지대를 더 올림으로써 오히려 더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소작농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주는 가만히 앉아서도 계속해서 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가는 자본을 생산수단으로 삼고 임금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으로 삼는다. 물론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임금노동자 역시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자신의 노동력으로 더 많은 이익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또 문제다.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양극화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에도 양극화가 일어난다. 대체하기 어려운 지식노동자의 경우 자본의 이익이 실현될수록 더 많은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의 경우 그 임금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결국 지식노동자들이 일한 결과 또한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 많은 이익은 자본가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구조적인 것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될수록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부에서 인위적으로 자본이익의 증가를 막을 수 있을까?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정부에서 자본가들의 자본이익 대부분에 세금을 매겨 거둬들인 다음 복지를 통해 재분배하면 자본소득과 임금소득의 격차로 인한 양극화는 사라지거나 아니면 최소한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한다면 더이상 자본주의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건 그냥 사회주의다. 자본을 통한 이익의 실현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자본주의가 아니게 된다. 그런 것을 바라는가.


당장 자영업자들의 인건비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엔지니어들은 키오스크라는 무인단말기를 만들었다. 당장 키오스크는 더 적은 노동력을 사용해서 더 적은 비용만을 지출하며 자영업자들이 업장을 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국 키오스크가 보급되면서 키오스크 제조업체와 자영업자들은 더 많은 이익을 남기지만 그에 비례해 키오스크가 담당하던 업무에 종사하던 이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노동시간이 줄어들며 임금이 줄어드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래서 키오스크를 금지할까? 키오스크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조차 반자본주의적인 것이다. 그렇게 자동차공장에도 로봇이 늘고, 거대한 컨테이너선에도 최첨단 항법장치로 최소한의 선원들만이 탑승하게 된다. 더구나 키오스크로 당장의 인건비 지출을 줄였어도 결국 그 상당부분은 임대한 건물주와 프렌차이즈 업체에 로얄티로 지불될 것이다. 아니 키오스크마저 패키지로 프렌차이즈 업체에서 로얄티를 더 요구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구조인 것이다. 그를 통해 최소한 자본을 소유한 자영업자나 키오스크생산업자, 혹은 건물주, 프렌차이즈 업체들만 일방적으로 돈을 버는. 그런 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발전이라 부른다. 문재인 정부가 아니었다면 과연 언론은 키오스크를 지금처럼 부정적으로만 보도하려 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자본의 이익만 늘어난다고 마냥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건 이미 20세기 대공황으로 모두 겪어 알고 있다. 결국 2008년 금융위기 역시 그같은 너무 넘쳐나서 주체할 수 없게 된 자본의 이익이 갈 곳을 잃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흘러간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자본의 안정성이다. 자본이 안정적으로 순환할 수 있도록 자본가들과 타협해야 하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자본이 시장에서 순환하여 일정한 이익을 꾸준히 거둘 수 있도록, 그러니까 소작농들이 굶주리다 못해 결국 쓰러지게 되면 더이상 지주들도 마냥 앉아서 이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시장에서 더 많은 소비가 꾸준히 이어지며 결국 자신들의 이익실현에도 도움이 된다. 소비가 사라지면 바로 시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시장을 유지하는 동력은 생산이 아닌 필요이며, 공급이 아닌 소비다. 그 소비의 주체는 결국 임금노동자일 것이다.


어째서 저소득층의 소득은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는가. 어째서 최저임금을 올렸는데도 고소득층의 소득만 계속해서 오르고 있는가. 그나마 최저임금을 올려서 이 정도였다는 것이다. 4차산업을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 더욱 저숙련노동자들의 자본시장에서의 지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진실이다. 이데올로기다. 자본주의만이 모든 구성원들에 멋진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건 우리보다 양극화가 더 극심한 선진국들이 말해준다. 자본주의의 고도화와 양극화는 비례관계에 있다. 그나마 그런 가운데서도 어디까지 노동자의 소득은 기대한 만큼 늘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냥 시장에 맡기라고. 정부는 가만히 있고 규제만 풀며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며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라고. 그런데 자영업자들도 임금노동자는 아니지만 자영노동자로 분류되어 있다. 사실 자영업자들도 자신의 자본에 더해 자신의 노동력으로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더구나 한국사회에서 대부분 자영업자보다 상위에 프랜차이즈라는 더 큰 자본이 존재한다. 참 어렵다. 경제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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