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사회에서 남녀간에, 아니 모든 직종과 계층 간에 갈등이 심화되는 이유는 내가 가장 불쌍하기 때문이다. 나만 불쌍하다. 나만 힘들다. 그러니까 네가 좀 양보해라. 네가 좀 희생해라. 그래야 내가 살겠다. 그런데 상대 역시 그러고 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아예 내가 더 힘들고 불쌍하니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더 힘들고 불쌍하니까 어떤 말도 해서는 안된다. 서로 그러고 상대의 입까지 틀어막으려 하니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사회적 갈등이 감정적 대립으로 이어진다. 씨발 그래서 네가 더 힘드냐? 좆까 네가 더 불쌍하냐? 그런데 다 힘들고 불쌍하다. 싯달타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원래 산다는 자체가 힘들고 불쌍한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서로 힘들면 나눠 들고, 아프면 위로하며, 불쌍한 이들을 돕고 보듬는다. 원래 개잡는 백정도 만인지상의 왕을 동정할 수 있는 것이고, 시구문밖 거지도 만석꾼 부자를 연민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조금씩 부족한 것이 있고 그래서 안타까운 것도 있다. 그것을 서로 이해하며 사는 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언론이 개새끼라는 이유다. 사실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서로 대립하는 두 집단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충실히 객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더 지식인들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선진국일수록 한 나라의 리더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함부로 구성원 사이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발언을 자제한다. 속내야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화합과 포용을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트럼프가 괜히 미국의 주류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런 사정이 있고, 저들에게는 저런 입장이 있고, 그러므로 이런 부분에서 서로 이해하고 타협하며 함께 화합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도 어려운가?


내가 여성주의자들이나 반여성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하는 지점도 이것이다. 그냥 하잘 것 없는 갑남을여 장삼이사 필부필부들이야 상관없을 것이다. 무시하는 게 아니고 실제 주어진 사회적 역할이 그렇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그러하다. 그래도 한 사회, 한 집단의 리더라는 것들이다. 하물며 정부부처의 장이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어느 일방의 주장만을 대변하면서 갈등을 부추긴다. 어느 일방의 입장만을 대변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 조장한다. 역대 여성가족부 장관 가운데 진선미야 말로 최악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장관이면 장관다운 신중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위임한 정부의 요인으로서 자칫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국민들에 미치게 될 영향을 더욱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여성들도 남성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남성들도 여성들의 불리함을 이해한다. 여성만 남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만 여성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양보하고 배려하며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어째서 여성에는 남성이 없는가? 여성주의에는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여성가족부에는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남성 없이 여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여성 없이 남성이 존재할 수 없는가? 이 사회는 여성 혼자만, 아니면 남성 혼자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서로 자기가 불쌍하다 경쟁할 필요 없다. 그런 식이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가장 불쌍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쌍하지 않다. 나름대로 힘들기도 하고 어려운 일도 있고 그래서 때로 살기 싫을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만큼 남들보다 좋은 점도 분명 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도 있을 테고, 나보다 더 어렵고 불쌍한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러면서 나보다 더 잘나고 더 형편도 좋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질시할 필요도 그를 원망하거나 비난할 이유도 없다. 우습게 여기고 깔아볼 필요도 없다.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존재한다. 다만 어떻게 그런 가운데 조화를 이룰까.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포용국가의 시작이다. 그 포용국가와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이 진선미 장관이고 여성가족부이며 정부에 기생하는 극단적 여성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여성주의에는 남성이 없다. 그냥 여성들만 사는 아마존을 꿈꾸던가. 남성들이 무지해서 여성주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주의에 대한 비판과 여성에 대한 비난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그마저 안되는 자체가 스스로 여성은 피해자라 의심없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남성은 가해자이기만 할까? 그러면 가해자인 남성이 없으면 여성들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사장은 직원을, 직원은 사장을, 선생은 학생을, 학생은 선생을,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가난한 이들은 부자를,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 답게,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를 배려하고 고려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최선을 다한다. 일부러 갈등을 조장하려는 양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주장으로만 지면을 채우는 언론들을 보면서. 거의 모든 언론들이 그렇다. 지식인도, 정치인도, 심지어 정부부처마저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이 나라는, 이 사회는, 이 공동체는 어느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만을 위한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공존은 서로에 대한 이해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성 혼자서만 살아갈 수 없다. 남성 혼자서도 살아갈 수 없다. 사용자도 노동자도 결국 함께 살아남아야 할 공동체의 구성원인 것이다.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공존을 꾀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언론 개새끼를 외치며. 나라가 썩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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