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도 어렸을 적 책을 많이 읽는 것에 대해 부모님의 우려가 상당히 컸었다. 학교공부만 잘하면 된다. 책을 너무 많이 읽으면 학교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러고보면 동아시아 문명이 어느 순간 서양문명에 추월당한 이유일 것이다. 공부가 출세의 수단이 되었다. 따라서 출세에 도움이 되는 유교경전 이외의 공부란 존재할 수 없었다. 잡학이라 여겨졌고 방술이나 좌도로 불리기도 했었다.

 

아마 얼마전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한줄 영화평이 여러 커뮤니티에서 꽤나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명징과 직조라는 표현이 너무 어렵다.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단어를 쓴 것은 지적허영이며 대중과 유리되어 있으므로 잘못된 평론이다. 하지만 과연 이 두 단어가 그렇게 어렵고 쉽게 보기 힘든 단어들인가. 그런데 정작 그다지 유식하지 않은 나 역시 가끔 글을 쓰며 저 단어들을 쓰고는 했었다는 것이다. 굳이 사전 끼고 일일이 찾아볼 필요조차 없이 포털에서 검색만 하면 바로 단어의 뜻을 알 수 있을 텐데도 그런 최소한의 노력조차 없이 부정부터 하고 본다. 그런 것은 알 필요 없다. 굳이 그런 것들을 알려 해서도 안된다. 당장 사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최근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의 말버릇 하나가 여러 미디어 등을 통해 화제가 되고 있는 중이다. 모른다. 몰랐다. 알지 못했다. 그런데 전혀 난처하거나 부끄러운 기색조차 없이 당당하다. 자기가 모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아니 당연하지는 않아도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모를 수 있는 것이지 어떻게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모른 채 산다고 크게 아쉽거나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사법고시에도 합격했고 검사까지 될 수 있었다. 공안검사로서도 꽤나 열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출세와 관계되지 않은 것들은 굳이 알거나 알려 할 필요도 없다. 지극히 한국적인 실용주의의 모습일까.

 

원숭이와 인간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 가운데 하나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이라 한다. 자연상태에서 미지의 상대란 두려움의 대상인 것이다. 굳이 알려 살 필요도 없고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해서도 안된다. 이미 익숙하게 아는 대상만이 안전하고 마음놓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동물들은 새끼때가 지나면 더이상 미지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내보이지 않는다. 원숭이도 다르지 않다. 인간과 가장 닮았다는 유인원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오직 인간만이,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미성숙한 존재인 인간만이 끊임없이 위험을 무릅써가며 미지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래서 산넘고 바다건너 심지어 빙하까지 가로지르며 인간은 거의 지구위의 모든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탐구열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성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를 통해 인간은 본능을 거스르며 불을 소유할 수 있었고, 수많은 도구를 만들고, 자신이 속한 세계가 돌아가는 이치를 찾아나서게 되었다. 인류의 수많은 위대한 발견과 발명들이 그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굳이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통나무배 하나에 의지해 바다로 나서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메마른 사막을 가로지르며, 위험한 것을 알면서도 깎아지른 절벽을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필요없으니까. 괜히 위험하고 성가시고 번거롭기만 하니까.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동아시아 사회는 그래서 활력을 잃고 어느새 정체되기 시작했다.

 

공부란 단지 출세를 위한 수단이다. 자기가 사회생활을 하고 먹고 살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만큼만 공부하면 된다. 아니 굳이 공부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시험문제를 빼돌리고, 뒤에서 담합과 부정을 저지르고, 어찌되었거나 결과만 같으면 공부같은 건 필요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열심히 공부하던 학생들이 대학에만 진학하면 아예 책을 손에서 놓기 일쑤다. 대학에서도 전공공부보다는 취직에 도움이 되는 공부에 더 열심이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것이 올바른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필요치 않는 것들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것은 낭비다.

 

무지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전혀 부끄럽지 않다. 전혀 당황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는 행위가 부당한 것이다. 굳이 자신의 무지를 일깨우고 지적하는 행위야 말로 잘못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떠드는 여론들을 곧잘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더이상 알려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아는 한계 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채 관성만으로 자기들끼리 떠들며 대세를 만든다. 당장 몇 년 전 타진요 사태만 해도 조금만 찾아보면 너무나 명확한 것을 그저 자기들끼리 자기들만 아는 근거와 논리만으로 검증하려다가 개망신당한 것 아니던가. 그럼에도 자기들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또 변명하고 위로하며 합리화하고 있었다.

 

엘리트라는 것이다. 그래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 1야당의 대표에 유력한 대통령후보로까지 꼽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마저 무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원내대표인 나경원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우겨대면 사람들이 알아서 넘어가 줄 것이다. 판사출신이다. 대한민국의 교육이 그동안 추구해 온 엘리트들의 민낯이 이런 것이다. 양승태와 우병우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일까. 그와 똑같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증오하고 적대하며 알고자 하는 최소한의 노력마저 포기하는 수많은 익명의 네티즌처럼. 유력대선후보를 통해 한국사회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무지는 당연히 부끄러운 것이다. 무지란 명사가 아닌 동사다. 알지 못하는 자체가 아닌 앞으로도 알려 하지 않는 행위 자체를 뜻한다. 예전과 다르다. 책도 귀하고 배울 곳도 드물었던 전근대사회와 지금은 전혀 상황이 다르다. 그냥 인터넷에서 잠시 검색만 해도 대부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자칭 네티즌이라는 것들마저. 인터넷에 기생하는 그들마저. 그리고 유력대선후보가 모른다는 말을 당연하게 하고 있다. 그냥 현상인 것이다. 괜히 내가 낯뜨거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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