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있다.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데 워낙 공부를 하지 않아 성적이 바닥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노는 것도 아들의 선택이니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의사가 되고 싶은 아들의 꿈을 위해 한 번 다그쳐주어야만 하는 것인가.


공부 못하는 아들이 밉다. 공부 잘하는 아들만 예쁘다. 단지 공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의사가 되고 싶다면서 그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을 소홀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아들이 의사가 아닌 연예인을 목표로 한다면 공부가 아닌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하기를 바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분노다. 바른 길을 가지 않는 아들에 대한 실망과 그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다. 마냥 자신의 바람과 기대만을 강요하는 것은 단지 감정의 배설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들이 미운가. 왜 그들에게 화가 나는가. 바로 거기에서 증오와 분노가 나뉘게 된다.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다. 따라서 그를 위한 대안도 있고 마침내 이루고자 하는 목표도 있다. 모든 감정은 그 과정에서 해소되어 버린다. 단지 미울 뿐이라면 이유도 원인도 대안도 과정도 결과도 전혀 필요없다. 남는 것은 단지 싫은 존재에 대한 말살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정의라 부른다.


불은 파괴를 뜻하기도 하지만 정화를 뜻하기도 한다. 조로아스터교의 상징이 불인 이유다. 여러 종교에서 불을 제의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불로 태움으로써 모든 더러운 것을 소멸시킨다. 불로 태움으로써 모든 더러운 것을 지우고 순수한 것만을 남긴다. 단지 파괴만을 위한 불이 아니다. 숲을 태우고 난 자리에는 타고난 재를 양분삼아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난다. 불사조도 타고난 재속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문재인이 말하는 분노의 의미다. 그리고 안희정이 받아들인 분노의 해석이기도 하다. 과연 이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이 사회와 구성원들이 지켜야만 하는 원칙과 상식, 정의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아무것도 없다면 굳이 누군가를 미워하고 화내고 다그치고 벌주어야 할 이유도 없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적당히 눈감아가면서. 서로 그저 거스르지만 않으면서.


정치란 원래 정의다. 정치란 원래 분배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공평하게 나누어 쓸 것인가. 그래서 권력의 권자는 저울의 권자다. 정치인의 의지가 그 사회의 규준이 된다. 무엇을 위해 대통령이 되려 하는가. 대통령이 되어 무엇을 그토록 간절히 이루고자 하는가.


분명히 이 짧은 공방에서 문재인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더 확실해지게 되었다. 아직 안희정은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인으로서는 높이 평가해도 역시 지지할 대상을 고르는 기준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더 영리한 사람이 아닌 더 정의로운 사람이다.


한 번은 좌절을 겪어봐야 한다. 진짜 정치란 무엇인가 고민해봐야 한다. 큰 무대에서 놀아봐야 한다. 중앙정치란 지방단체와는 전혀 다르다. 보좌관으로서 보던 세상과도 전혀 다르다. 정치인으로서는 인정한다. 과연 문재인이다. 신랄한 한 방이었다.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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