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는 문과와 무과 할 것 없이 모두 양인으로 일정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 자격이라는 것도 가까운 조상 가운데 천인이 없고, 죄인이거나 서얼이거나 재가한 과부의 자식이거나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은 특히 문과라면 반드시 양반의 자제들만 볼 수 있었다 생각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양반만이 과거를 봐서 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후기 가면 문벌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아예 문중에서 힘을 모아 과거를 후원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될 성 싶은 자제를 골라 문중에서 돈을 지원해서 과거에 합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그 정도 힘을 모아야만 합격자를 낼 수 있을 정도로 과거준비가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단 뜻이다. 과거공부에 필요한 책 자체도 비쌌고, 무엇보다 한창 일할 나이에 글공부한다고 다른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그러면 누가 자신은 물론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는가? 과연 아무것도 없는 농투성이 무지랭이가 그 많은 노력과 비용을 양반 한 번 되어 보겠다고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조선에서 그토록 관리들의 부정이 극심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물이 들어가는데, 더구나 그 재물을 지원해 해 준 문중이 뒤에 버티고 있는데, 그러나 정작 관리들이 받는 녹봉이란 기념삼아 받아 챙기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나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어떻게 그 비용들을 다시 회수하겠는가. 합격하기까지 힘을 모아 도와준 문중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럼 현대로 돌아와보자. 대학입시는 그냥 공부해서 시험을 치르는가? 그냥 아무것도 없이 그저 교과서만 가지고 학교만 열심히 다니며 시험을 치르면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가? 사법시험은 어떨까? 불과 얼마전까지 흔한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였었다. 집안에 사법고시 합격자 하나 내보겠다고 딸네미들 모두 공부 포기시키고 취직시켜 돈 벌어오게 하는 가족 이야기나, 아니면 온갖 험한 일 하면서 남자 뒷바라지하다가 끝내 배신당하는 여자의 의야기 같은 것이다.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고시촌 쪽방에 살면서 죽어라 책값도 비싼 법전과 판례집만 들이파야 한다. 학원도 다녀야 한다. 고시촌 쪽방은 공짜로 사는가? 거기서 먹고 입고 쓰는 모든 비용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가? 그런 노력 없이도 합격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 그런 적지 않은 비용과 그를 위한 수고를 감당하고서야 합격의 영예를 얻는 것이다. 


법조인이라는 것들이 저리 썩어있는 이유도 그래서인 것이다.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그러라고 부모가 판사 시킨 것이라고. 그러라고 일가친척들까지 하나가 되어 검사 만들려 한 것이라고. 본전은 챙겨야 할 것 아닌가. 이자는 남겨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벌고 더 누리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양심이고 뭐고 돌아볼 여유가 없는 것이다. 판사라는 것들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혹시라도 소송할까봐 일본 기업들에 면책특권같은 것을 주자고 제안했다는데도 대놓고 비판하는 판사놈 하나 없는 것 보라. 권력에 눈치를 보고 권력에 영합하느라 사법독립이고 사법정의고 다 내팽개쳤는데 그것을 감싸주는 것이 바로 사법독립이란다. 검사는 뭐 말할 것도 없고. 왜 그렇게 되었는가? 사법고시가 바로 그런 시험이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정시가 아닌 수시인가? 어째서 사법고시가 아닌 로스쿨인가? 수시전형의 상당부분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배려에 할당된 이유다. 로스쿨 역시 장학금 제도를 통해서 실력만 있으면 큰 경제적 부담없이 법조인에 도전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상에서 경쟁한다면 더 많은 비용과 수고와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쪽에 훨씬 유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다. 그래서 아예 출발선 자체를 비대칭적으로 만들고 서로 다른 기준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체계를 갖춘다. 사실 더 많은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제도다. 차라리 시험이 더 편하다. 과거 한국이 지금보다 못살던 시절 그나마 시험으로 사람들을 줄세워 뽑아야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몇몇 부정은 그냥 사례다. 여성문제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사법시험과 정시만으로 선발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구조적인 문제는 내포하게 된다. 몇몇의 일탈과 아예 구조적인 전체의 문제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서 시급하게 개선해야 하는가. 그 잘난 사법시험으로 신분상승해서 판사나 검사놈들이 하는 짓거리 보라. 하긴 자기가 그러지 못하는 것을 질투할 뿐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하면 더 훌륭한 개새끼가 될 수 있을 텐데.


오래전 학교를 다녔던 이들도 거의 안다. 단칸방에서 학원비도 없는 아이들에게 대학이란 이룰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아이들은 그야말로 개천의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저 실지렁이처럼 진창을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지금이라고 많이 다를까? 그럼에도 그런 경우들에게도 혹시라도 대학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모두가 함께 경쟁하는 공정한 시험이 아닌 그런 이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길을 통해서.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그런 수많은 어쩌면 좌절했을지 모르는 꿈을 위해서.


양반만 볼 수 있었던 시험이 아니라 양반만이 합격할 수 있었던 시험이었다. 아무나 볼 수 있는 시험이지만 서울대 합격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봤더니 제법 사는 집 자식들이 거의 태반이었다. 더구나 그 상당수는 또한 서울이나 수도권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니까. 어떤 집에 태어났고 어디서 사는가도 모두 실력이니까. 차라리 모두가 문제있는 것이 낫다. 재미있는 주장들이다. 항상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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