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성인지교육이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원래 대등한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일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개는 일방적 관계일 때다. 일방적으로 보호해야 하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받들어야 하거나. 상대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가 알아서 보호하고 알아서 받들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란 단지 그런 관계일 뿐인가?


과연 남성이 여성을 몰라서만 그런 수많은 성간문제들이 일어나는가? 물론 육체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더 강하고, 사회적으로도 남성이 여성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 남성이 여성을 더 배려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이 사회에 남성이 절반이고 여성이 절반인데 항상 여성들이 남성들의 배려에만 기대어 보호만 받으며 산다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 무엇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높이자면서 여성이 남성을 배려해야 하는 상황이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인가. 어머니가 아들을 배려할까? 아들이 어머니를 배려할까? 남성인 김대리가 여성인 한차장을 배려할까? 여성인 한차장이 남성인 김대리를 배려해야 할까? 어차피 남성인 장과장이 여성인 강부장에게 무례를 범하면 위계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일이다.


흔히 성희롱이네 성추행이네 크게 문제삼는 사안 가운데서도 가만 보면 단지 습관적으로 같은 남성들에 하던 행동을 여성들에 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경우도 적지 않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흔히 하는 말이고 하는 행동들인 것이다. 그런데 상대가 여성이 되니 문제가 된다. 그래서 성인지교육도 하는 것이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말하고 행동할 때 조금 더 조심하고 배려하라. 마찬가지로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말과 행동들에 대해서 여성들도 충분히 남성에 대해 이해하고 배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실 실제 현실에서 많은 여성들이 그러고 있기도 하다. 아니라면 경찰은 성범죄로 신고한 여성들과 신고당한 남성들로 가득차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원만하게 남성의 선의를 이해하고 악의를 걸러내며 함께 어루어지며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항상 강조하던 공동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성만 따로 사는 것도, 여성만 따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에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많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어우러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남성들만의 일방적인 이해와 배려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성이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본능적이고 습관적인 행동들에 대해서 여성들도 남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당히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며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불편함이나 불쾌감 정도는 앞으로도 함께 해야 할 동료로써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배려하며 넘어갈 필요도 있다. 내가 미투나 성범죄와 관련해서 남성들에게 주장한 바도 바로 이것이다. 조금 더 불편하고 때로 더 불쾌하더라도 그러나 여성들의 불리한 처지를 이해해서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과연 여성들은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해 아는 것보다 남성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렇게 굳이 남성들에 대해 알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남성들에 대해 평소 깊이 이해하고 있는가. 그래서 남성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아서 항상 적확하게 어김없이 판단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상관없다. 남성의 선의를 이해하고 악의를 판단해서 거를 수 있을 정도가 된다면 남성들에 대한 여성의 판단은 항상 옳을 테니까. 여성들의 행동 또한 항상 옳을 테니까. 그렇지 못하니 결국 남성들의 반발을 사고 마는 것이다. 여성들의 부당한 오해와 심지어 음해가 억울함을 낳고 분노로 이어지며 불만이 혐오와 증오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여성은 남성을 모른다.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판단되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공포다. 여성주의에 의해 남성은 결국 잠재적 범죄자로 억압받게 될 것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성인지교육이란, 아니 성인지감수성이란 자체가 여성에 한정된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은 경우 여성들도 남성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여성주의가 그런 것들을 부추기고 있기도 하다. 남성은 오로지 가해자로. 남성의 선의는 무시한 채 오로지 악의만을 강조하며. 그럼으로써 여성들로 하여금 남성에 대한 혐오감과 공포심을 가지도록 몰아가고 있다. 그것만이 오로지 남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전제로 남성들에게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라 강요한다. 이런 건 성인지감수성도 뭣도 아니다. 그냥 여성이든 남성이든 오로지 자신들의 편견 아래 가두고 싶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들이 남성들을 적대하고 남성들이 그 적의에 굴복하게 함으로써 그 위에 자신들이 서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도 아래 오로지 공포와 혐오의 대상일 절반의 남성들과 함께 앞으로도 살아야 하는 여성들 역시 피해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에 여성이 없다는 이유다.


여성들이 마음놓고 살기 위해서도 남성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는 만큼 여성도 남성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남성이 왜 그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지. 남성이 어떤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그런 생각들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그러므로 남성이 여성인 자신에게 선의를 가지고 그러는 것인지 악의가 있어 그러는 것인지. 그런데 사실 남성도 남성을 잘 알지 못한다. 여성도 여성을 온전히 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정작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닌 토론이어야 하는 것이다. 남성 자신도 자신이 모르던 남성을 알고 여성 자신도 자신이 모르는 여성을 알아가며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야 양성평등도 이루어질 것 아닌가. 서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오로지 권력에 기댄 강요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평등이 진짜 평등일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순간 권력이 여성들에게서 등돌리기라도 하면 그때는 무엇으로 양성평등을 지킬 것인가.


그러고보면 그동안 남성들은 그래도 양성평등이라는 대의 아래 꾸준히 여성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해 왔던 것 같다. 오히려 그래서 그런 불만들이 여성주의 만큼이나 극단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성주의자들은 단 한 번도 남성을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남성이란 존재를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회적 약자라 여겨 그런 오만함을 참고 넘겼었는데 이제 정부의 권력을 등에 업고 현실에서 위력을 사용하려 하고 있다. 언제까지 남성들만 일방적으로 여성들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인가. 여성은 남성에 대해 전혀 알 필요도 이유도 없는 것인가.


일방적인 관계는 일방적인 위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은 남성들이 여성들에 양보하며 배려하니 겉으로 보기에 양성평등이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남성 역시 여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래서 정확한 현실에 대한 이해 없이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런 양성평등이 오래갈 수 있을 리 없다. 그마저도 결국 남성중심의 위계 아래 존재하게 된다. 남성의 이해와 배려와 양보가 사라질 때 그런 것들은 허깨비처럼 하루아침에 함께 사라지고 만다.


무엇이 양성평등인가? 어떻게 양성평등을 이룰 것인가. 그래서 이화여대와 관련한 음모론도 썼던 것이다. 저들이 과연 양성평등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추구하고 있기는 한가. 단지 여성을, 여성주의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부분 여성들은 그러고 함께 살아가려 하는데 저들만 유별나다. 그럼에도 그런 여성들까지 양보하고 배려하려는 것은 여성을 보호하려는 남성들의 슬픈 속성이다. 안타깝기조차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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