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주장한다. 심지어 많이 배웠다는 전문가들조차 그리 떠드는 이들이 많다. 규제를 줄이고 기업을 지원해서 성장을 이루면 더 많은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기업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일단 그따위 기사를 쓰는 기자놈들 월급부터 줄이고 나서 시작하자.


한 마디로 70년대 박정희의 신화에 사로잡힌 결과라 할 것이다. 아직까지도 80년대 고도성장기의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씨춘추에 칼을 강에 떨어뜨리자 배에 표시를 하고는 찾겠다고 강물로 뛰어드는 남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이 강에 배를 띄우는 것은 그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강물을 따라 배는 흘러갈 것이고, 굳이 노를 젓거나 바람을 받는다면 강을 거스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배가 떠가는 것은 생각지 않고 그저 배 위에서 칼을 떨어뜨리는 것만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는 것은 생각지 않고 지나간 성공의 기억에만 사로잡혀 제자리만 맴돈다. 미래는 커녕 현재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과거에만 사로잡혀 생각하고 행동한다. 하긴 그래서 수구라 불리는 것이기도 할 터다.


기술의 발달은 항상 노동의 양과 질의 감소를 목표로 이루어져 왔다. 당장 바퀴가 그렇다. 물레가 그렇다. 수많은 도구와 기계들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굳이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와 비슷한 정도로 생산할 수 있도록. 굳이 더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그만한 일들을 해낼 수 있도록. 그것은 산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산업혁명 이전에도 이미 다양한 도구와 장치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보조하고 있었다. 사소하고 단순한 작업들은 아주 간단한 장치와 도구만으로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거대한 기계들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하면서 더이상 전과 같은 다수의 숙련된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굳이 훈련과 경험을 통해 고도의 기술을 체득한 장인이 아니더라도 단순한 조작법만 알면 누구나 일정한 수준의 제품들을 거의 무제한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지어 자본주의 초기 사용자들은 차라리 더 싸고 다루기도 쉽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아이들을 공장노동자로 고용해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라도 기계만 문제없이 작동한다면 생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과연 그런 달라진 생산환경에서 인간의 노동력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간이 하는 일들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그만큼 비례해서 인간의 노동력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게 된다. 벌써 오래전부터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남아돌게 된 농촌의 노동력들이 도시로 이동하며 역사가 크게 바뀌기도 했었다. 최근 4차산업혁명과 관련해서 주목받고 있는 스마트팩토리만 하더라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 아니 아예 거의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는 수준에 이른 상황이다. 그런데도 과연 기업이 성장하고 생산이 늘어나면 전처럼 고용도 따라서 늘어나게 될 것인가? 안타깝게도 그동안도 기업은 많은 투자를 해왔었고 그에 따라 생산 역시 크게 늘어난 바 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고용은 제자리걸음인가? 아니 오히려 감소하고 있는가? 이미 고도로 첨단화된 산업구조 자체가 더이상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때문이다. 투자를 하고 설비를 늘려봐야 첨단생산시설을 늘리면 늘렸지 굳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해서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다시피 경제에는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생산이고 하나는 소비다. 이 역시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일관되게 관찰되는 경향 가운데 하나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발사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다. 굳이 피팅모델이라는 직업도 필요 없었다. 택배기사도 통신과 교통이 고도로 발달하며 비로소 나타난 직업이다. 예전에야 직접 부모가 아이를 돌보면 되었지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필요없었다. 당장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유치원은 그야말로 있는 집 자식들이나 다니는 곳이었다. 전문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업이 나타나고, 판매자와 판매자 사이를 중개하는 중매인이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뭔 말이냐면 더이상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없다면 인간의 노동력이 아직 필요한 분야에서 경제활동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이다. 더이상 생산을 늘려봐야 고용은 늘어나지 않기에 소비를 통해 새로운 생산과 고용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노동자 개인이 자신의 노동력을 생산수단으로 삼도록 만듦으로써 그들이 새로운 경제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생산자들이 더 많은 생산을 하고 그것을 팔아 남는 이익으로 경제가 돌아갔듯 이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수단삼아 얻은 소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을 만든다. 선진국들에서 이미 시도하고 있는 기초소득제도 그런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이미 전부터 많은 정부들은 정부의 지출을 늘려 사회서비스의 상당부분을 스스로 감당함으로써 일부러 수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어차피 생산으로 고용을 늘릴 수 없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살 수 있게끔 하는 소비를 통해 새로운 고용과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냥 주장하는 것처럼 기업의 투자만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보다 정부당국자들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수많은 관계자 지식인들이 그런 문제들을 오래전부터 지적하고 주장해 온 바 있었다.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져내린 정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난데없이 아무 근거없이 툭 튀어나온 그런 터무니없는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냥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혀 여전히 정부의 발목을 잡으려는 야당과 언론들이 안쓰러울 정도다. 미래를 내다 볼 지혜도 현실을 마주 볼 용기도 저들에게는 없다. 그냥 그동안 해온 그대로. 그냥 예전에 하던 것처럼. 그것을 다수 개인들이 받아서 따라 읊어댄다. 그래서 그것이 답인가? 그냥 답이라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더이상 투자와 고용은 비례하지 않는다. 생산과 고용도 역시 비례하지 않는다. 양이 고용을 담보하지 못한다면 이제는 질이다. 중소기업을 숙련노동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그런 일환이다. 전체 노동자의 수가 줄어들면 개개의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늘려서 전체의 규모를 유지한다.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벌써 20세기도 아닌 21세기를 20년 가까이 지나온 터다.


그냥 안쓰러워서 괜히 했던 말 또 반복하게 된다. 기업이 투자만 늘리면. 기업이 성장하고 생산이 더 늘게 되면. 그런 건 이미 IMF 이전에 끝난 지 오래다. 그리고 미래는 그보다도 더 가혹하고 잔혹하다. 언제까지 과거에 붙들려서 살 것인가. 기자란 놈들이 전문가인 척 쓰는 기사들을 비웃게 되는 이유다. 시대는 바뀌고 있다. 한참 전부터 바뀐 지 오래다. 그들만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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