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이른바 회귀물이라 불리는 장르소설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일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무엇부터 할까? 생각밖에 답은 명확했다.

"더 열심히 더 잘 놀아야겠다."

의외로 가난이라는 것도 견딜 만 하다. 내 적성과도 맞지 않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인데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 들어오고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다. 굳이 더 열심히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는 건 없구나.

더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낙관이 아니다.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이나 희망 또한 없다. 그래도 상관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사람은 살 것이고 살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쉽게 운명론에 빠지는 모양이다. 다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면 현실의 어떤 고단함도 괴로움도 어떻게든 타협하며 넘길 수 있다.

그래서 이름붙인 것이 비관적 낙관론이다. 아마 한국인이 가지는 한과 신명이라는 이율배반적 정서도 바로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어차피 얼마의 곡식을 거두든 하늘이 정할 일이고, 기껏 곡식을 거두어 들이더라도 어느 놈이 와서 다 빼앗아 간다. 오늘만 산다. 내일따위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구한말 선교사들이 와서 보고 경악할 정도로 억척스레 먹어대고 있었다. 때되면 잔치를 열고 제사를 벌이고 그렇게 춤사위와 노랫가락 속에 현실의 시름을 잊는다.

희망이 있으면 절망 또한 따라붙기 쉽다. 기대가 있기에 실망하고 믿음이 있기에 배신감에 떤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마음다칠 일 따위 없게 된다. 그래도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을 때면 때로 날카로워지고 때로 예민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현정부와 여당에 실망하는 젊은 유권자들의 마음도 한 편으로 이해가 된다. 이런 정부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정책들을 바랐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바란 개혁적인 여당의 모습이란 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 터다. 그런데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까. 딱 참여정부 당시 내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 가졌던 감정과 비슷할 것이다. 그러니까 참여정부에도 열린우리당에도 지지를 보내지 못하겠다. 단 한 표도 주지 못하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사회당이었었다. 지금도 남아있는가는 모르겠지만.

말하자면 나는 더이상 정치에 대해 더이상 아무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문재인이 처음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을 때 내가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문재인 정부를 지지한다는 자체부터 어울리지 않는 선택인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 구성원들부터 고만고만한 것들이고, 정부의 요직을 차지한 인간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모르지 않기에 바라는 것도 없다. 그저 자유한국당보다 조금만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그럴 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잘하면 칭찬할 마음이 생긴다. 아마 지금이라면 아이가 생겨도 크게 기대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면서 잘 보듬을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그래도 바라는 것도 있고 기대하는 것도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진 더 좋아진 세상에 대한 희망이 가시기 전이라 그런 것이다. 그래서 실망도 크고 분노도 크다. 절망은 때로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게 딱 꼰대짓이란 것일 게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그래봐야 어차피 모두는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인 때문이다. 온전히 아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째서 젊은 층에서 민주당과 정부에 대한 비토가 높은가. 특히 젊은 남성 가운데 민주당과 정부에 등돌리는 이들이 왜 이리 많은 것인가.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섰는가. 바른미래당은 자유한국당과 다르다. 최소한 드러난 이미지로 전혀 다른 정당이라 할 수 있다. 보수화된 것은 맞지만 어차피 민주당도 보수정당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선택을 과연 민주주의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무지나 오해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20대에서 가장 많이 지지하는 정당이 민주당이란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젊은 층에서 가장 기대하기에 그만큼 가장 비판도 받는 정당이란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답이 없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설훈도 민주당 관계자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를 모르면 답도 없다.

정의란 누군가 강제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도 주나라 종묘에 가서는 예를 묻는다. 무엇이 옳고 어떤 것이 바른가. 내가 왜 그토록 여성주의자를 혐오하며 비판을 쏟아내는가. 다시 한 번 저 놈들은 구제불능임을 떠올리며. 이제는 더이상 예전과 같은 혈기를 드러내지 못할 것을 알게 된다. 그러려니. 3,40대에서 지지율 높은 것을 자기들 잘해서라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게임하면서 순간의 선택으로 수 만 골드를 날리고 겨우 몇 천 골드의 행운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산다는 게 그렇다. 시간을 거스른다고 더 큰 야망을 가지기보다 그 순간을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늙은 모양이다. 사람이 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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