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이미 기업인들 모아놓고 간담회를 연 순간 모든 대책은 세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이미 그때 러시아에 고순도 불화수소의 공급가능여부를 타진하고 답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단지 보도만 어제 나온 것이었다. 과연 김현종 안보실 2차장이 미국을 방문하면서 들고 간 카드가 무엇일까? 바로 그동안 침묵하며 방관하던 미국이 중재에 나서고 있었다.

러시아의 고순도불화수소 공급제안은 당장 두 가지 큰 효과를 가져왔다. 첫째 고순도 불화수소는 더이상 일본만 공급할 수 있는 독점적인 소재가 아니게 되었다. 당장은 몰라도 시간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일본기업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어쩌면 기초산업의 한계일지 모른다. 그래서 세계유수의 기업 가운데 기초소재나 원료를 주력으로 생산하는 기업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기업들도 정작 일본이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소재나 원료에 대해 상당한 기술력을 확보한 상태다. 자금과 시간, 무엇보다 확실한 거래처만 확보되면 바로 일본기업들을 대신해서 양산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일본 기업 혼자 잘나서 소재산업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삼성이나 하이닉스 LG같은 확실한 거래처가 그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새로운 기술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주며 또한 기술개발과정에서 납품처와의 피드백을 주고받고 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좋은 것이다. 아니 러시아만일까? 네덜란드의 반도체 제조장비기업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일본기업인 히타치가 공급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삼성이 거래선을 다변화한 탓이 컸었다. 일본의 거래단절은 결국 비슷한 분야에서 경쟁하는 다른 나라의 기업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말이 좋아 독점이지 그래봐야 한국의 상식으로 공급처란 곧 하청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기업들이 사주지 않으면 괜히 값만 비싸고 쓸 데도 한정된 고순도 불화수소를 어디다 쓰겠는가. 오래 보관도 할 수 없을 텐데 손실이 커지면 결국 기업은 넘어가고 만다. 그것도 노리는 기업들이 꽤 될 것이다. 기술만 빼돌려 바로 국적만 바꾸면 얼마든지 한국과 거래를 이어갈 수 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가? 다만 그동안 익숙하게 써오던 소재가 아닌 전혀 생소한 다른 기업에서 생산한 소재에 맞춰가야 한다는 점이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만한 각오가 서 있다면 오히려 이것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독일도 미국도 기술만 있으면 세계의 모든 나라가 삼성과 하이닉스라는 반도체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기업들과 바로 거래를 트고 싶어한다.

더구나 하필 그 대상이 러시아라는 것이 문제다. 18세기 이후 유럽의 열강과 미국의 최우선 전략목표는 바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던 오스만제국을 지원해서 전쟁도 몇 번 치렀었고, 러일전쟁 당시에도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차셰계대전 이후 소련시절부터 러시아와 항상 적대하며 경쟁하는 관계였던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 만큼이나 러시아의 동아시아 국가로의 진출은 신경쓰이는 일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하필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반도체 산업에 한 발 걸치려 한다. 그동안 한 해 수 천 억을 벌어들이던 일본의 소재산업을 바로 그 러시아가 대신하려 한다. 겨우 유럽국가들과 함께 경제제재와 저유가로 발을 묶어 놓았는데 일본 덕분에 수입도 안정적인 사업을 하나 챙기게 되었다. 아마 미국이 바로 중재하겠다 나선 이유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대로 계속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계속되면 결국 미국의 이익에도 피해가 간다. 반도체 생산의 차질로 미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넘어 미국의 안보와도 직결될 수 있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어떻게 바로 러시아에 불화수소의 공급여부를 타진할 생각을 했던 것일까. 고순도불화수소를 제외하면 나머지 제품들은 다른 경로로 이미 대체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미친 짓이라 했던 것이다. 시장점유율이 이미 100%가 아니었던 점부터 독점적일 뿐 독점 자체는 아니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미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일본의 정치환경에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자칫 흐트릴 수 있는 한일간 갈등과 분쟁을 길게 이어갈 수 없다는 한계도 있었다. 바로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간다. 일타쌍피다. 러시아가 대신 공급해주면 더이상 일본기업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오히려 일본 기업이 거래처를 잃을 위기에 놓인 을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과연 러시아의 개입을 미국이 가만 지켜만 보고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장기전으로 가려면 한 번 해 보라. 간담회는 그것을 선언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당장 굽히지도 않을 것이고 장기전도 얼마든지 감수하겠다. 일본은 버틸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 그러면 이제라도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풀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기업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아니 개인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한다. 언제 다시 정부에 의해 외교적 수단으로 사용될 지 모르는 일본기업의 제품을 마음놓고 계속해서 받아 쓸 수 있을 것인가. 언제 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똑같이 라인을 멈출 걱정부터 해야만 한다. 일본기업과의 신뢰는 이것으로 완전히 깨진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에서 주도해서 보조금까지 지급하며 기술개발을 지원해도 국제사회에서 용인할 수밖에 없을 만큼 명분이 쌓인 것이다. 최소한 한국의 기업들은 일본의 기업들을 믿을 수도 없고 믿어서도 안된다. 이 모든 피해는 한국 기업들이 입게 되는 이상으로 일본 기업들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도 이런 사태를 촉발한 아베정부에 대한 지지가 과반을 넘는다는 것은 일본사회의 문제인 것인지.

어떻게 해도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인 것이다. 흉년이 들어 쌀이 부족하다고 아예 쌀을 팔지 않으면 결국 사람들은 죽거나 아니면 다른 쌀을 구할 곳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쌀을 독점하고 있다고 감당할 수 없이 쌀값을 올리면 쌀을 살 사람마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그렇게 떠나게 된 이들이 농사를 지어 쌀을 공급하는 농민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쌀을 사 줄 사람도 없고, 농사를 지어 쌀을 공급할 사람도 없다. 그러면 쌀을 파는 사람만 남아 혼자서 쌀을 퍼먹고 버텨야 하는가. 그럼에도 피해가 작지 않을 것이기에 위기감을 가지고 대응하지만 그렇다고 언론이 떠드는 것처럼 당장 죽을 것 같이 호들갑을 떨지도 않는다. 어쩌면 지금 가장 침착하고 냉정한 곳은 바로 한국 정부일지 모른다. 어째서 그런 것이 가능한가. 오히려 어설픈 외교로 국익을 해치는 것은 보수언론과 정치인들이 그토록 찬양해마지않는 일본의 아베정부인 것이다.

분명 한국과 일본 두 나라만 비교하면 아직은 일본이 한참 우위에 있다. 1인당 GDP는 많이 따라 왔지만 인구차이에서 비롯된 경제규모나 기본적인 기술들에서 상당한 손색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삼성과 일본 기업들을 놓고 비교해 보면 어떨까? IT시대에 메모리반도체를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과 일본의 기업들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영향력이 클까? 세계에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워낙 단단히 묶여 있어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기회만 되면 일본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싶을 그밖의 나라의 기업들인 지금도 너무나 많다. 한국 언론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일본 없으면 죽는다. 일본 기업들 없으면 한국은 망한다. 한국언론이 아니다. 최소한 일본과의 무역분쟁에 있어 대부분 보수언론의 입장은 철저히 일본의 그것에 맞춰져 있다. 일본이 요구하는대로 일본이 바라는 바들만을 보도한다. 그런 언론을 굳이 소비할 필요가 있기는 한가.

아무튼 아베 정부로서도 더이상 상황을 끌고가기 곤란한 지점까지 와 버렸다. 하긴 북한까지 끌어들임 되도 않는 이유들을 댈 때부터 한계구나 느끼고 있었다. 치밀하지도 정교하지도 않았다. 괜히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일본은 강하다. 일본은 무섭다. 일본과 싸우면 진다. 하지만 정작 성급하고 무모했던 것은 다름아닌 일본 자신이었다. 약한 것은 일본이다. 새삼 확인한다. 이번에야 말로 일본을 이길 수 있다.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본을 극복하는 계기다. 아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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