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저러니해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날카로운 직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노동자의 생산성과 관련한 어떤 주장들에 대해서다. 과연 노동자의 임금이 생산성에 비례해야 한다면 생산에 쓰이는 기계의 가격도 마찬가지로 생산성에 비례해야 하는 것인가. 노동자의 임금처럼 기계값 역시 그만큼 생산을 못하고 이익을 낼 수 없으면 깎아야 하는 것일까.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이야기다.

기계를 하나 만드는데는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있다. 흔히 말하는 원가라는 것이다. 새로운 기계라면 당연히 그를 연구개발하기 위한 비용이 들어갈 테고, 일단 설계가 끝난 다음에는 그것을 실제 생산하기 위한 설비와 자재들을 준비해야 한다. 아예 다른 나라 쳐들어가서 주민들을 먹을 것도 주지 않고 죽을 때까지 부려 일시키고, 자재들까지 모두 약탈해서 쓰더라도 그렇게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하로 받아서는 더이상 기계를 생산하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간 이익을 전혀 남기지 않는 원가가 1억이라 했을 때 그 기계로 일 년 동안 백만 원을 겨우 번다면 과연 유지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백만 원 이익에 맞게 기계값을 낮춘다면 역시 가능한 일이겠는가.

극단적인 예로 10억 하는 최첨단 기계를 사들여서 1년에 이쑤시개 100만 개를 만든다. 그래서 이익이 얼마 남지 않으니 기계값을 천만 원으로 깎겠다. 거기에 응하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10억짜리 기계가 있으면 그에 맞는 가치있는 상품을 생산해서 이익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10억이라는 기계의 가치는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의 몫인 것이다. 차라리 그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을 생산하지 못할 것이면 그에 맞는 보다 값싼 기계를 사는 편이 옳다. 그래서 불변자본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하긴 기계도 다르지 않다. 단 하나 10억 하는 기계를 협박이든 뭐든 생산자나 원소유자로부터 강탈할 수 있다면 이쑤시개를 만들든 성냥을 만들든 이익은 남는 것이다.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면 위력으로 이익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노동력이 가변자본인 이유다.

한 마디로 노동력이란 공짜다. 비용이 들지 않는다. 사람은 그냥 태어나는 것이다. 그냥 그곳에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이 존엄하지 않다면. 인간에게 귀천의 차이가 있다면. 가난한 노동자따위 일하다 죽든 굶어 죽든 전혀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실제 19세기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고아들을 모아다 강제로 일을 시키는데 영양실조와 과로로 죽으면 그냥 파묻었었다. 사람은 계속 태어나고 죽어도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목숨은 고려할 가치조차 없이 비천하다. 노동력의 가치란 오로지 생산성이라 주장하는 진짜 이유인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배제하면 노동력에 남는 건 생산 뿐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노동력은 진짜 공짜인가?

먹고 살아야 한다. 몸을 누일 집도 있어야 하고, 하루 먹을 식량도 있어야 하고, 어디 나가려면 입을 옷도 있어야 한다. 일을 마치고 한 잔 술을 마시며 동료들과 대화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훌륭히 키워 성인이 되게 하고. 왜 출산율이 이렇게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아이는 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나마 일정 이상 소득이 있으면 결혼도 많이 하고 아이도 많이 낳는다. 인간은 공짜가 아니다. 노동력은 그런 대부분이 인간이 가진 수단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대가는 인간이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것이어야 하다. 지금의 노동력을 가지는데 필요했던 비용 만큼이어야 한다. 하지만 무시한다. 왜? 인간은 단지 목적이 아닌 수단에 불과하니까. 특히 노동하는 인간은 존엄도 뭣도 없는 그냥 생산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들을 위한 복지정책들조차 불의한 포퓰리즘으로 규정된다. 그들에게 주어져서 안되는 것이다.

노동생산성 논란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이 아닌 단지 노동력이라는 것. 존엄한 존재가 아닌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노동생산성은 반드시 포퓰리즘과 함께하게 된다. 그것은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노동자에게 주어질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생존은 노동력과 별개로 여겨야 한다. 노동자 자신의 삶이란 노동력의 가치와 별개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에게는 인간이 아닌 노동력만이 남는다. 최저임금논란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과연 노동자 개인이 그만한 임금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아닌가. 그만한 임금을 받을 권리가 노동자에게는 있는 것인가. 하지만 기계에 기계의 본체를 배제한 기능만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기계의 기능이란 기계의 본체에 달린 부속과 같은 것이다. 때로 몇 가지 부품을 교체해서 본체는 남겨둔 채 기계의 기능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면 기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러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노동자의 노동력인가 아니면 노동자 자신인가. 무엇보다 노동생산성의 정체다. 10억짜리 기계를 가지고 한 개에 1원 하는 이쑤시개를 만드는가, 아니면 한 개에 만 원 하는 반도체를 만들 것인가. 그러면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 아주 오래전부터 - 심지어 90년대부터 운동권 선배들과 논쟁해 온 부분이다. 경영자가 노동자보다 몇 십, 몇 백 배 그 이상 연봉을 받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기에 역시 그만한 연봉을 주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오기도 한다. 누구의 책임이겠는가.

한 마디로 한 사회에서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 즉 노동력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란 최소한으로 고정되어 있다 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그 정도 비용은 써야지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 이하가 된다면 때로 개인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적인 부담이다. 영속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인간을 고용해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높은 임금에도 여전히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들이 있다. 유럽과 미국의 기업 가운데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임금에도 오히려 그 높은 가격 때문에 더 많은 이익을 남기며 팔리는 제품들이 있다. 흔히 말하는 고부가가치상품이란 것이다. 기계의 가치는 고정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려는 사업에 맞춰 기계를 구입하고, 이미 기계가 있다면 그에 맞춰 이익이 남도록 상품을 생산해서 판매한다. 모두 경영의 영역이다. 더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더 싼 기계로 바꾸기도 한다. 그래서 더이상 인건비를 견딜 수 없는 한계산업은 더 싼 인건비를 찾아 해외를 떠돌게 된다. 자연스런 현상이다.


마르크스의 전제를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노동력이 가변자본이란 것은 자본가들이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사용자는 물론 노동자 자신도 그렇게 여긴다. 조금만 줄이면. 조금만 더 아끼면. 그래서 조금만 더 인내한다면. 하지만 한계가 있다. 당장은 몰라도 결국에 어느 순간 한계는 찾아온다. 이미 한국사회에는 그 한계가 지접 출산률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와 있다. 가계부채라는 현실로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부분 전문가들이 한결가이 하는 말이다. 바로 구조조정. 기업의 인력만 잘라내는 것이 아닌 한계에 이른 기업들도 도려내야 한다. 돈이 되는 사업들만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기본일 테지만.

노동력의 주인은 누구인가. 너무 간단하면서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무엇을 기준으로 지불되어야 하는가. 노동력에 대해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그 노동력을 소유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인가. 노동이란 정말 마르크스가 주장한대로 가변자본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기계를 상대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기계에는 모두 가치가 정해져 있으며 따라서 사업하는 사람은 그를 고려해서 기계를 사들이고 또 그를 전제로 상품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벌써 한 세기도 훨씬 지난 이야기임에도. 아직은 현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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