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고백하자면 2002년 당시 나는 노무현이 초인인 줄 알았었다. 이명박을 지지하며 눈물흘리던 어느 아주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무현이 대통령만 되면 뭔가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당시 워낙 먹고사는 게 힘들었던 터라 정치따위 관심가질 여유가 없었던 탓이 컸다. 그래서 어땠을까?


내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면 세상에 초인이란 없다는 것이다. 혁명이 아니고 한 번에 세상을 뒤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정치수준은 곧 국민수준이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의 책임은 곧 그 정부를 선택한 국민의 책임이다. 그래서 지난 9년간 이 나라 정치가 어떠했었는가.


처음에는 이명박을 선택한 국민들에 실망했지만 이내 그런 국민들이 있으니 이명박 같은 이가 대통령이 되었구나 납득하게 되었다. 박근혜 역시 2012년 당시 국민들 수준에 맞는 대통령이었다. 1:1대결에서 더 많은 국민들이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문재인보다 더 적합하다 판단하고 있었다. 이후로도 40%가 넘는 지지로 정부는 견제조차 거의 받지 않고 있었다. 그런 박근혜가 탄핵당했을 때 그런 박근혜를 선택했던 국민들 역시 탄핵당했던 것이다. 부끄러워해야 한다. 국민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수치여야 한다.


어차피 민주당이 쓰레기라는 건 그동안 민주당을 지켜봐 온 대부분 국민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자유한국당보다 그나마 조금 낫다는 것이지 한국사회에서 주류로 올라선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기 때문이다. 현정부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도 시큰둥한 것은 이 사회 주류들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그에 대해 무감각한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작 50보 100보지만, 아니 어쩌면 90보 100보일 수 있지만 그러나 한 번에 10걸음씩 줄여나가면 언젠가는 그 차이를 더 벌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정부와 여당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에 대해서도 그다지 불만이 없다. 때로 아프기는 하지만 그런 가혹한 비판들이 민주당과 정부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다만 합리적이지 못한 비판은 그냥 비난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내게는 민주당이나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가 요만큼도 없다. 문재인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한 나라의 정치란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제왕조에서도 그런 건 불가능했다. 모두가 찬양하는 세종조차 어쩔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 그 치세 동안 백성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 못했었다. 실제 백성들이 태평성대라 부르며 좋은 시절을 보냈던 것은 한참 뒤인 성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그렇다고 성종이 세종보다 정치를 더 잘했는가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실패했다고 나쁜 군주가 아니며 성공했다고 좋은 군주도 아니다. 하물며 아무것도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임에야. 민주당의 실체는 그동안 도저히 민주당에 표를 줄 수 없어 진보정당을 찾아 헤매며 다닌 지난 선거들로도 증명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민주당과 현정부를 지지하는가. 바로 그 10걸음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아주 미미하지만 그래도 자유한국당보다는 낫다. 어쩌면 사소할 수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자유한국당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들이 쌓여서 정치가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어차피 가능하지도 않은 한 번에 모든 것을 뒤바꾸는 혁명보다는 지루하고 답답해도 그렇게 한 걸음씩 바꿔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잘한 것이 있으면 순수하게 잘한다 칭찬할 수 있다. 못하는 것은 뭐 어차피 그런 것이겠거니.


그렇기 때문에 한 편으로 자유한국당이 민주당보다 더 잘한다면 지지해 줄 수도 있다. 그러기를 바라기에 민주당을 지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당보다 더 나은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에 표를 주겠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에도 민주당보다 조금은 낫다 여긴 진보정당에 표를 주어 왔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민주주의라는 말 그대로 국민의 선택이 역사를 만들어간다. 자유한국당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민주당보다 더 나아지는 수밖에 없다. 바른미래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라도 민주당보다 더 좋아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면 정말 헛웃음만 나올 뿐. 소수정당인 정의당을 제외하고 그나마 의석이 좀 된다는 정당 가운데 그나마 봐줄만한 정당이 민주당 뿐이라는 게 지금으로서는 그저 어이없기만 할 뿐이다.


원래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었다. 김영삼에 대해서도 김대중에 대해 비판적이었었다. 아마 나같은 지지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30대와 40대에서 정부와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것도 그런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다. 어차피 국민 수준이 그런데 그런 국민이 선택한 정치인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일 터다. 이 사회의 주류라는 것들이 크게 다를 리 없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조금이라도 나은 놈들이 있다. 그래도 기대할 만한 놈들이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도 아직까지 모든 정책에서 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도 바른미래당보다도 민주평화당보다도 정의당보다도 낫다. 그 이상 무슨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민주주의는 절대 초인도 혁명도 허락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을 지지하면서도 여론에 못이겨 속도조절하겠다는 것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토목으로 경기부양은 않겠다던 정부에서 예타면제로 토목을 통한 경기부양에 나서겠다는 것도 역시 그러려니.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민주당이 포르노에 대해 엄격한 제재를 가하겠다는 것도 그럴 수 있겠거니. 여성주의 정책에 대해서도 대의 만큼은 동의한다. 다만 그 디테일에서 너무 미숙하다. 비판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유한국당을 찍을 것인가? 자유한국당이 지금보다 나아지면. 자유한국당이 그래도 민주당의 대안정당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면. 그러나 과연 지금 자유한국당이 그러한가? 그런데도 민주당이 싫어 자유한국당을 지지한다면 원래 성향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당은 못견디겠는데 자유한국당은 괜찮다? 최소한 내가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에서 그것은 성립할 수 없는 논리다.


현정부가 모든 부분에서 잘하고 있는가. 모든 부분에서 유능한가.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이해찬은 내가 지금 가장 싫어하는 정치인의 첫머리에 올라 있다. 민주당이야 원래 죽도록 싫어하던 정당이다. 하지만 필요하니까. 지금은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한 걸음이 너무나 절실하니까.


원래 몽골로이드가 코카서시안과 유전적으로 갈라지게 된 계기가 불과 수 만 년 전 고작 2천 년 동안 빙하에 갇혀 고립되면서였다. 혹독한 추위와 심각한 식량부족에도 살아남기 위해서 당시 동아시아로 이동했던 인류는 에너지 소모를 줄이고 체열의 발산을 최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하게 되었다. 정확히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 해당 형질을 가진 아이들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았으므로 선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그 차이는 아주 미미했을 테지만 수 천 년의 세월 동안 수 백 세대가 지나면서 원래 같은 뿌리에서 갈라졌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코카서시안과 전혀 다른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지금 아메리카 원주민들 역시 당시 동아시아인들과 공통조상에서 갈라져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하지만 어느새 그 결과는 너무 큰 차이로 벌어져 있는 것이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면. 그럼에도 역사의 반동과 퇴보에 대해서도 이해한다면. 그럼에도 인류는 여전히 앞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별 것 아닌 그런 차이들로 인해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 사회는 궁극적으로 더 나아지고 더 진화하게 될 것이다. 원래는 그것이 진보여야겠지만. 뿌리깊은 절망과 회의는 그마저 온전히 믿지 못하게 만든다.


세월이 가르쳐 준 지혜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는 쉬운 일도 어려운 일도 없다. 되는 일도 안되는 일도 없다. 아마 이런 것을 중용이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나라도 낫다면 나은 것이고 하나라도 좋다면 좋아지는 것이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내가 유일하게 믿고 지지하는 한 가지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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