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권위를 앞세우는 체제일수록 말이나 글에 군더더기가 많다. 당장 조선왕조에서 국왕이 내리는 교서를 보라. 전근대 유럽에서 쓰인 공식 외교문서도 비슷하다. 그래서 기호학이라는 것도 발전하게 되었다. 도무지 못알아먹을 휘황한 어휘들 가운데 진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가. 요즘은 그런 것 없다. 아예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도록 구체적으로 간명하게 정리해서 발표하는 경우가 더 많다.

북한이라는 체제를 이해해야 한다. 한 마디로 전제왕조다. 전제왕조의 군주란 곧 신과 동격이다. 그래야지만 누구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된다. 자칫 자신의 권위에 도전할 지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자신은 무오류하며 어느 누구보다도 위에 있음을 확인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북한의 국방위원장인 자신은 세계최강대국인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와 동격이며 대한민국의 대통령 문재인을 꾸짖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면 그런 수식들을 지우고 한 번 김정은이 하는 말을 해석해 보자.

결국은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사정에 대해 잘 좀 말해 달라. 대한민국 역시 한반도 문제에서 당사자이니 조금 더 절박함을 가지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사정과 요구를 제발 좀 잘 전해달라.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자신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으니 저번과는 다른 바뀐 조건을 제시해 달라. 지난 번 요구는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지나친 것이었으니 조금만 수정해서 자신들의 입장도 생각해 달라. 한 마디로 지금 이 대로는 내가 결단하기 어려우니 미국과 한국이 합의해서 명분을 주었으면 좋겠다. 나 급하고 아쉽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다가는 당장 쿠데타가 일어나 자리에서 내쫓길 지 모르니까. 북한 주민들에게 최고권력자로서 권위를 잃는 순간 자신의 권력은 물론 가족의 목숨까지도 위태로워질 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애써 강한 척 거친 말로 자신을 숨긴다.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당국자들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미국은 몰라도 우리 정부의 당국자들은 북한의 스타일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한미공조가 중요한 것이다. 북한을 누구보다 잘 아는 우리의 협력 없이 미국 혼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동안 보수정부에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어떤 진전도 이루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못한 것이다.

아무튼 결국 북한이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회답을 내놓은 것이나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하노이회담보다 진전된 내용이면 받겠다. 한국이 나서서 그래도 하노이회담에서보다 명분이 서는 내용이라면 기꺼이 자신들도 받겠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던 굿 이너프 딜 역시 트럼프 대통령과의 짧은 회담으로 그 대답을 들은 것이나 같다. 원래 정상끼리의 회담은 이견이 많을수록 길어지는 것이다. 이미 모든 합의가 끝났다면 이야기가 길어질 이유가 없다. 굳이 정상들이 부부동반으로 어울려야 했던 이유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내용이면 자신들도 기꺼이 받을 수 있다. 빅딜이면서 스몰딜인 언론들이 미국 전문가들의 입을 빌어 비판한 바로 그것이다.

의외로 빠를 것 같다. 대충 흘러가는 정황을 보면 김정은이나 트럼프나 서로의 속사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지난 회담의 결렬로 인해 서로 납득할 수 있는 합의점에 대한 계산도 거의 끝나간 듯하다. 그리고 둘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우리 정부가 한다. 정확히 설득한다기보다는 둘 모두가 나설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럴 수 있도록 명분을 제공한다. 배우들인 것이다. 국제외교란 것이 그렇다. 답이 정해진 경우 각 주체들은 배우가 되어 훌륭하게 자신을 연기한다. 물론 내가 이해한대로 풀려간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겠지만. 바람이기도 하다. 따뜻한 바람이 곧 북에서 불어올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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